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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 : http://www.dailyseop.com/data/article/34000/0000033372.aspx

[강정구 컬럼] “‘6·25는 침략전쟁’ 주장이야말로 국보법 위반”

[데일리 서프라이즈 2005-10-12 12:05]


일주일 만에 빨리 걷기 운동을 하던 동네 야산에 올라갔다. 가을인데도 유달리 싱싱한 잎사귀는 여름을 연상시키고 풀냄새는 더욱 향기롭고 싱그러운 맛을 풍긴다.

오늘 내일 다가올지 모르는 불길한 굴레 때문인지 자연의 아름다움이 더 한층 생생하게 다가온다. 덕분에 울적하던 마음도 가시게 되었다. 그리고는 어릴 때 숲속과 풀밭에서 뒹굴던 까마득한 옛날 옛적을 떠올리게 되었다. 자유에 대한 솟구침일까 왜 갑자기 그 옛날로 돌아갔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곧 상상의 나래는 20여 년 전 박사논문을 쓰던 그 시절로 돌아갔다. 그 때 남몰래 혼자서 많이도 울었다. 그리고는 나지막하게 ‘오빠생각’, ‘두만강’, 황성옛터 등의 민족 애환이 담긴 노래를 부르면서 나를 달랬다. 한국전쟁 중의 세균전 자료와 일본 731부대에 의해 세균전 실험대상으로 희생된 조선 사람들을 연상하면서, 그 가운데 한 명이 행방불명된 사촌 형님이 아닐까 하는 가상을 해 보면서 울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해방인 줄 알았더니 또 다시 미국-소련을 중심으로 한 외세가 우리 역사를 난도질 한 것을 실증적으로 확인하고, 더구나 이런 오욕의 역사를 오욕이 아니라 자랑으로 여기도록 교육받은 역사왜곡에 의분과 다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현대사 바로그리기’와 ‘통일 터닦기’를 학문적 소명과 정체성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펼쳐질 나의 인생 미래를 조용히 관조해 보았다. 쓴 웃음으로 내린 결론이 여러 가지 시련을 함께해야 되는 팔자였다. 이러한 전망에 유학후배 부인께서 왜 그런 짐을 자진해서 걸머지려 하느냐면서 안타까워 하던 모습이 갑자기 생각난다.

여러 가지 시련이야 어차피 팔자소관이지만 이를 둘러싼 온갖 허무맹랑한 혐의나 비방 등은 바로 잡아둘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또 많은 분들이 의도치 않게 오해를 하고 있는 부분도 상당한 것 같다.

하나,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 미국에 배은망덕 할 수 있느냐라는 문제제기

조선 시대의 유림과 선비들은 비록 부자지간의 인연일지라도 잘못에 대해서는 분명히 지적하고 필요하면 사죄를 촉구하라고 후손들에게 가르쳤고 필자 역시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이런 교습을 받았다. 더구나 참, 진실, 진리를 추구한다는 학문하는 사람까지도 조그마한 인연인 미국 유학에 발목 잡혀 미국의 문제점에 눈감게 되면 이 세상에 정의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런 자세로는 왜곡으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의 참모습은 결코 밝혀지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유학이라는 인연은 물론이거니와 부모와 자기 자신에게까지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때 역사의 진실은 밝혀지고, 학문은 꽃이 피고, 우리 사회는 투명해지고 정의가 살아 숨 쉴 수 있을 것이다.

친일민족반역자 아들딸들이 자기 부모와 조부모에까지 이런 엄격한 잣대를 대었더라면 시민사회 수준의 과거청산이 자발적으로 이뤄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역사적 상상력을 해 본다면 이 문제제기가 얼마나 잘 못된 것인지는 분명할 것이다.

둘, 국민정서에 반하는 6·25통일전쟁론이라는 문제제기

학문적 결론은 객관적 자료, 타당한 방법론, 논리적 추론, 연구자의 양심 등이 종합·포괄화 되어 귀결되는 것이지 학자가 남의 눈치나 보면서 그들이 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권력의 간섭과 탄압, 국민정서라는 여론몰이, 돈과 명예 등을 초월하고 이들 간섭으로부터 굳건히 독립을 견지해, 곧 학문의 자유 속에서 귀결된 학문적 결론만이 값진 것이다.

참이나 진실은 결코 산술평균값이나 중간 값이 아니다. 이런 것에 구애되거나 국민정서에 맞는 학문만이 허용될 때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는 코페르니쿠스의 지적혁명도 불가능 했을 테고, 미국의 이라크침략전쟁도 정당화 되고 말 것이다. 또 국민정서는 수시로 바뀌므로 학문적 귀결은 국민정서의 변화에 따라 춤을 추듯 바뀌게 되는 이 엄청난 사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셋, 통일전쟁론의 찬양·고무성 문제제기

‘6·25는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내전’이라는 필자의 전쟁성격 규정은 남의 공식입장인 ‘6·25불법남침론’에서 남침을 인정한 셈이다. 이는 오히려 북의 공식입장인 남한의 북침에 대한 정당방위론을 부정한 셈이다. 이처럼 학문적 결과는 어떤 이해당사자에게 때로는 득이나 실도 되고, ‘찬양’도 되고 ‘이적’도 될 수밖에 없다.

학문적 결론은 객관적 자료 등에 의해 학문적으로 귀결되는 것이지 어느 단체나 특정인의 이해득실에 따라 달라질 수 없다. 만약 달라진다면 그것은 객관성도 설명력도 없어지기 때문에 더 이상 과학적 지식이나 학문이 아니다. 이는 진실과 진리를 배반하고 학자의 양심을 파는 것이며, 곡학아세해 지식인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자기부정이며, 학문의 존립기반 자체를 허무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국보법 7조의 찬양·고무라는 사법적 잣대는 원초적으로 학문의 자유와 양립될 수 없는 것이다.

넷, 소영웅주의의 발로라는 문제제기

이번 필화사건이 소영웅주의의 발로라면 나의 학문 일생 전체가 소영웅주의의 연속이라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 밝힌 것처럼 박사논문을 쓸 때부터 나는 ‘현대사 바로 그리기’와 ‘통일터닦기’를 학문적 소명과 정체성으로 삼았고 이후의 학문적 궤적이 온통 일관되게 이 소명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현대사의 참과 진실을 은폐하고 남북의 진정한 화해와 협력을 가로막는 주범인 냉전성역을 허무는 작업이야말로 현대사 바로 그리기와 ‘통일 터닦기’의 요체이기 때문에 여기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냉전성역허물기 이게 나의 학문일생이었다.

이 냉전성역은 지난 반세기 이상 극단적인 냉전분단체제 아래 남북이 서로를 원천적으로 적대·부정하여 상대방에 극단적인 덫 칠을 가하여 악마화하고 자기 것은 절대적인 선으로 미화하거나 신성시 해온 과정에서 형성된 불가침의 금기영역이다. 이에는 공식적인 단일 표준정답이 있어 일체의 다른 해석이나 평가는 비록 학문연구라 하더라도 사문난적으로 취급되어 옥살이나 죽음 또는 불이익을 강요당할 정도여서 냉전성역은 파시즘과 폭압 그 자체다.

이에는 6·25, 주한미군, 연방제 통일, 주체사상, 김일성, 김정일, 민족자주, 평화협정, 정통성, 항일무장 투쟁, 민간인학살 등이지만 6·25는 냉전성역 0순위로 성역 중에 성역이다.

냉전성역은 그 기반이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종교적 신념과 같은 맹목적 반공반북이데올로기다. 반(反)과학이기에 진실의 왜곡·은폐이고 반(反)이성적이며, 맹목적이기에 극단적이고 폭력적이다. 이래서 남북의 진정한 화해, 협력, 평화, 통일을 원천적으로 가로막으며 학문사상의 자유 등 민주주의의 기본을 침해한다. 그래서 이 성역은 허물어져야 한다. 이성적이라면 응당 이 냉전성역 0순위인 6·25에 대한 필자의 냉전성역허물기를 색깔몰이 할 게 아니라 밀어주고 끌어줘야 할 것이다.

박사논문 때부터 여러 가지 시련과 굴곡을 각오한 이 같은 학문적 행위가 소영웅주의라면(물론 동의하지 않지만) 우리 학문공동체에 정말 이런 소영웅주의자가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말 많았다면 나의 학문의 길은 훨씬 덜 외로웠을 것이고 오늘과 같은 어이없는 일들은 벌써 사그리 지게 되었을 것이다.

다섯, 미군정 여론조사 ‘왜곡’의 문제제기와 역사평가

2005년 10월 3일(월) 2:59 <동아일보>는 아래와 같이 필자에게 포문을 열었다.

“강정구교수 ‘국민 다수가 공산주의 지지’ 발언 진위 검증”이라는 제목 아래 “▽광복 직후 실제로 공산주의 지지자가 압도적이었는가?=강 교수는 발표문의 16쪽 각주(脚註) 19번에서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분명 남북 전체가 공산화됐을 것이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좋아했다. 1946년 8월 미군정 여론국이 전국의 845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지지 세력이 무려 77%였고 자본주의 지지는 겨우 14%였다. 당시 조선 사람 대부분이 원하는 것이면 응당 그 체제를 택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강 교수가 인용한 미군정 여론조사 결과는 국사편찬위원회가 1973년 펴낸 자료집에 실려 있다. 하지만 실제 내용을 보면 강 교수가 조사 결과를 상당히 부정확하게 인용했음을 알 수 있다.

미군정은 1946년 7월 서울 지역 1만 명에게 ‘어떤 정부 형태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었다(강 교수가 인용한 1946년 8월 조사와 동일한 것으로 추정됨). 그 결과 ‘대의 민주주의’라고 응답한 사람이 85%로 압도적이었다. 공산주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의미하는 ‘계급 지배’는 5%에 불과했고, 과두제가 4%, ‘1인 독재’가 3%였다.

또 ‘어떤 경제체제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은 자본주의 14%,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10%(일부 자료엔 7%), 나머지는 ‘모른다’였다. 강 교수는 공산주의 지지율이 겨우 7%(혹은 10%)에 불과하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은 채 여기에 사회주의 지지율을 합쳐서 당시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훨씬 더 좋아했다고 주장하는 논리의 비약을 한 것이다 ... 이처럼 여러 조사는 당시 남쪽 국민 사이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율이 바닥권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1. 우선 이 여론조사는 서울대 민교협 발표문에서 각주에서 처리될 정도로 진부한 이야기였고 논문에서는 지엽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논문전체를 논하기보다 학계에서는 진부한지 오래인 각주 하나를 두고 너무 과잉반응을 보였다.

뒤에서 길게 인용한 필자의 1989년 발표 1990년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남·북한 농지개혁 비교연구: 민족주체적 시각에서” 한국산업사회연구회편 <경제와 사회> 통권 7호 1990년 가을호 204~212쪽) 210쪽에서 필자는 그 출처를 각주9(아래 인용은 각주4)에서 밝힌 것처럼 1989년판 강만길 교수의 글에서 재인용했다.

이후 1996년판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에 재수록된 위의 논문은 출처를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3> 104~105쪽’으로 고쳤고 잘 못 인용한 부분도(공산주의 지지율 4%를 7%로) 수정했다. 이처럼 이 여론조사는 필자가 1989년에 인용할 정도로 오래된 것으로 이번에 처음 인용하거나 새로운 주장을 펼치기 위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2. 해방공간인 당시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이 큰 차이가 있는 게 아니라 동일한 것으로 인식했다. 단지 조선공산당이 탄압받았듯이 공산주의의 경우 미군정의 탄압과 반공흑색선전 때문에 응답자가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지만 의도적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했다고 보기에 그 구분은 필자에게 무의미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물론 오늘도 일반인이 사회주의 자체를 막연하게 알고 있듯이 당시에도 응당 그랬고 또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차이 역시 잘 모르고 있었다. 이런데도 <동아일보>처럼 “당시 남쪽 국민 사이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율이 바닥권”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당시 반자본주의적인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한 높은 지지도를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3. 이 여론조사에서는 정치형태를 묻는 질문 항이 있었지만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집에는 포함되지 않았고 필자 역시 <동아일보>의 최근 주장을 보고 이를 확인했다. 이 정치형태 질문에 대한 답항은 “가. 개인독재(민의와는 무관하게) 3%, 나. 수인독재(민의와는 무관하게) 4%, 다. 계급독재(타계급의 의지와 무관하게) 3%, 라. 대중정치(대의정치) 85%, 마. 모릅니다 5%”로 응답자의 85%는 ‘라. 대중정치(대의정치)’를 선택했다. 이를 두고 <동아일보>(2005.10.3)는

“ ‘대의 민주주의’라고 응답한 사람이 85%로 압도적이었다. 공산주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의미하는 ‘계급 지배’는 5%에 불과했고, 과두제가 4%, ‘1인 독재’가 3%였다. 또 ‘어떤 경제체제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은 자본주의 14%,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10%(일부 자료엔 7%), 나머지는 ‘모른다’였다. 강 교수는 공산주의 지지율이 겨우 7%(혹은 10%)에 불과하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은 채 여기에 사회주의 지지율을 합쳐서 당시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훨씬 더 좋아했다고 주장하는 논리의 비약을 한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이 질문 항은 질문으로서 기본을 갖지 못한 것으로 성립될 수 없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답항 ‘라’의 대중정치와 대의정치는 동일하다고 보기 힘들고 오히려 서로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마치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답항을 억지로 만들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답항으로 자격이 없는 질문항을 근거로 당시 조선 사람들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보다 자본주의를 선호했다고 볼 수 없다.

<동아일보>는 더 나아가 답항 ‘라’의 원문인 ‘대중정치(대의정치)’를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대중정치와 대립될 수 있는 ‘대의 민주주의’로 자의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는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심과 비난을 피하기 힘들 것 같다.

해방공간의 여론조사를 해석할 때 유의할 점은 당시에는 ‘민주주의’란 결코 자본주의 옹호자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미국대통령이었던 트루만의 회고록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해방공간 남한 땅에는 두 종류의 민주주의가 있었다.

하나는 미국식 민주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식 민주주의였다. 좌익이건 우익이건 모두 다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있는데 위의 답항 ‘가, 나, 다’ 는 모두 독재를 표기하고 있기 때문에 응답자 대부분은 응당 ‘라’ 답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북한의 공식적인 국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 것만을 보더라도 해방공간 민주주의는 우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4. 필자는 이 여론조사를 하나의 자료로 보았지 이 여론조사 결과라는 단독 자료 때문에 해방공간 당시 조선사람들 대부분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선호했다고 주장한 것은 결코 아니다. 뒤의 긴 인용문에서 서술된 것처럼 필자는 이미 1989년부터 여러 가지 주객관적 조건 때문에 “외세의 개입 없이 순수한 내적인 역동력에 의해서 조선사회가 스스로의 길을 걸어갔더라면 그것은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역사통로였다... 이 진보적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인민 민주주의였다고 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점진적인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고 볼 수 있겠다”고 결론지었다.

아래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겠지만 외세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조선사회 전체가 사회주의화 될 객관적 요인으로는 사적 소유가 미미했던 경제토대의 특성, 계급구조의 불균형, 구래지배계급의 정통성 상실, 조선인 구지배계급의 경제적 지배계급에 국한된 제한성 등을, 주체적 요인으로는 노동·농민계급의 계급역량 성숙, 이들의 급진화, 좌익급진민족주의자의 독립운동의 헤게모니, 지배계급의 온정주의적 지배를 피지배계급이 극복한 점 등을 제시했다. 또한 국면적 요인이면서 촉진요인으로는 조선총독부의 건준 대상 정권이양, 해방이전의 소련군 진주 등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 역사자료로는 1945년 초기 해방이전에 발표된 미 국무성의 조선정세보고서, 1946년 트루만 미 대통령의 특사로 남북을 방문한 Pauley 특사의 보고서, 위의 <동아일보>가 제시한 여론조사, 미군정청 각종 자료 등이었다.

주목할 사항은 1943년 중경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외교부장 조소앙이 당시 주중미대사관에 전달하자 미국무성은 그해 8월 2일자 보고서에서 “비록 공산주의는 아니지만 좌익이데올로기를 지향하고 비혁명적인 과정을 통해서 반(半)사회주의 경제를 제창한다”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러한 분석과 논증의 기조에 이 여론조사 결과가 일치했기 때문에 자료로 활용한 것이지 아무 자료나 활용한 것은 아니다. 또 이 여론조사를 활용했다고 해서 이 여론조사 결과라는 단독요인만으로 해방공간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지향성을 논증한 것은 아니다.

이처럼 해방공간의 사회주의 지향성은 종합적 분석과 논증의 결과이지 단순히 미군정 여론조사 하나로 내려지는 결론은 결코 아니었고 최소한 필자에게는 새삼스런 학문연구 결과도 아니었다. <동아일보>에 필자의 논지를 반박한 몇몇 학자들이 과연 이 1989년 논문과 이후 이의 연속인 필자의 논문들을 제대로 읽어 보고 내린 결론인지 의심스럽다.

5. 이 분석에서처럼 해방공간의 역사흐름이 사회주의 지향이었고 또 여론조사에서도 이것이 반영되었다면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당시의 역사지향이 사회주의로 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학자로서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자본주의든, 무정부주의든, 사회주의든 선택은 당시의 조선 사람에게 응당 맡겨져야 하는 것이지 외세가 개입할 성격은 분명 아니었다. 더구나 당시는 일제의 35년 식민지 통치로부터 갓 벗어난 시점이기에 민족자주 지향은 최상의 덕목이었고 목표였다. 바로 친일파 숙청이 당시의 최우선 과제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는 명확하다 볼 수 있다.

엊그제 10월 10일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와의 국가보안법 문제에 관한 인터뷰에서도 이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때 필자는 아마 사회주의 통일한국에서 보다 지금의 남한에서의 나의 개인적 위상은 더 나았을 것이고 나에게 이로웠을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지만, 학자로서 이 개인적 기준에 따라 당시의 역사가 당연히 자본주의로 가야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이처럼 개인의 이해관계, 오늘날의 기준에서 과거의 역사평가를 복속시키고(몰역사적 결과론) 가치를 개입시키면 객관적 역사평가는 불가능해지고 학문은 학문으로서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역사는 역사 그 자체여야 한다.

6. 필자는 역사관에 관한 한 남북이 함께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곧, 북은 ‘발생적 결정론’(genesis determinism)에 빠져있고 남은 '몰역사적 결과론'에 빠져 있다고 비판해 왔다. 북한의 발생적 결정론 역사관은 “북한의 처음이 좋았으니까 지금도 좋고 남한은 옛날이나 처음이 좋지 않았기에 지금도 좋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초기의 친일파 청산 등과 같은 대남 우위성이 지금까지 지속되는 것으로 역사를 평가하고 있는 문제점을 북한의 역사관은 가지고 있다. 남한의 몰역사적 결과론은 “지금 현재가 좋고 대북 우위에 있으니까 과거도 좋았고 대북 우위에 있었다” 면서 과거를 미화하고 정당화 하여 역사를 왜곡시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경찰조사 과정에서 강조했지만 이 몰역사적 결과론은 현재의 기준을 역사평가의 잣대로 삼기 때문에 현재를 언제로 삼느냐에 따라 역사평가가 들쑥날쑥 춤을 추게 되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이 몰역사적 결과론은 오늘날 남한이 거의 모든 면에서 북쪽에 비해 우세하므로 오늘의 남쪽 기준에서 해방공간을 평가해 역시 분단이 사회주의식 통일보다 잘 됐다는 평가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에서 1970년 초반까지 북한은 남한에 비해 경제역량이 높았고 자주성도 앞섰다. 이 때문에 4·19 당시 경제적 요인 때문에도 ‘통일만이 살길이다’라고 외쳤다. 몰역사적 결과론에 의하면 1960년 당시는 북한이 남한보다 잘 살고 자주성이 높았기 때문에 해방공간 사회주의식 통일을 했어야 한다는 평가가 내려진다. 이처럼 역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평가할 것이 아니라 남북을 아울러 우리 모두는 역사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

여섯, 사상검증의 문제점

앞의 여론조사와 관련된 필자의 서술을 마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것처럼 보수언론들은 색깔몰이로 덫 칠을 가해 왔다. 논문이나 컬럼 어디에도 가치지향적인 언술이 없다. 학자로서 역사를 평가할 때 자본주의는 선, 사회주의는 악이라는 반공이데올로기를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 친북한도 안 되고 친남한도 안 된다. 필자의 경우 남북을 초월한 친민족이 기준이고(이를 두고 응당 민족지상주의로 몰아서는 안 될 것이다) 친역사적인 것이 잣대이다.

남한의 공식적인 해석과 역사를 찬양일변도로 평가하지 않으면 친북과 색깔몰이로 낙인찍는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이러한 필자의 학문적 기준과 잣대는 지금처럼 친북이나 친공으로 매도되기 일쑤다. 이렇게 학문·사상의 자유가 폭력몰이, 색깔몰이, 사법처리 등으로 원천적으로 제약될 때 자율성은 속박되고 이 결과 역동적 창조성은 녹슬고 말 것이다.

경찰조사도 가치지향의 문제로 연결시켜 진행되었다. 이에 필자는 굳이 아래의 논문을 제시해 사상검정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변화된 조건 속에 우리가 추진해야 할 통일의 방향에 관하여 시론적인 수준에서 논하겠다. 첫째, 통일 경제형태는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한 자본주의적 경제형태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는 중국형 사회주의를 포함한다. 이는 선택의 문제나 주관적으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데 따라 변화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행사하고 있는 객관적 규정력의 산물이다.” 출처: 강정구 “4월혁명과 현 단계 자주·민주·통일의 과제”(한국산업사회학회, <경제와 사회> 1998년 가을호, 통권 39호 227쪽).

학문이 살아 숨 쉬는 사회가 너무나도 필자에게는 소중하다. 물론 대부분의 연구자에게 국가보안법은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 연구주제가 연관이 아예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사람에게 해당된다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의 족쇄는 용납될 수 없다. 냉전성역 허물기를 학문의 소명으로 삼고 있는 필자의 경우 왜 이렇게 소중한 것인지를 법정에서 밝힌 적이 있다.

냉전성역 허물기라는 학문지향에 대하여 법정에서 변호사는 “혹자는 피고인의 이러한 태도가 너무 비판적인데 치우쳐, 학문으로서의 객관성이 약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에 대하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요?”라고 물었다.

“저는 저의 학문이 객관적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만 저의 학문적 연구결과가 객관성이 약한 것처럼 보이고 마치 학문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저의 주 연구분야가 현대사, 통일, 북한이고 이 분야의 연구주제는 대부분 냉전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되었기에 이것을 바로잡고 진실을 밝히는 것이 마치 학문이 아닌 것 같고 객관성이 덜한 것처럼 보이게 마련입니다. 대표적인 본보기가 한국전쟁입니다.

비정상적인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을 보면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보이게 마련입니다. 저의 학문연구 결과가 마치 객관성이 약한 것처럼 보이는 것 자체가 제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적 좌표인 민족, 민중, 비판 학문에 충실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진술했다.

일곱, 6·25는 불법 침략전쟁이기에 통일전쟁론은 성립될 수 없다는 문제제기

이 문제제기는 모순의 극치를 이룬다. 통일전쟁론은 전쟁주체자의 전쟁목표를 기준으로 한 전쟁성격 규정이다. 이에는 민족해방, 계급해방, 단순한 권력야욕(왕위쟁탈 전쟁이나 왕위계승전쟁), 민족통일, 지역통합, 종교 전파, 분단고착화, 징기스칸처럼 정복이나 영토 확장 등의 전쟁성격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따른 6·25의 성격규정은 1950년 10월 7일자 유엔총회 결의 376호처럼 통일전쟁, 북한의 규정처럼 조국해방전쟁, 남한의 북진통일론처럼 통일전쟁 등이 있을 수 있다.

대조적으로 침략전쟁은 국제법적 기준에 의한 전쟁성격 규정이다. 이에는 1950년 6월 25일과 27일 유엔안보리 결의 82호와 83호와 같이 평화파괴나 또 평화위협, 침략전쟁, 테러 등의 성격규정이 있을 수 있다. 위 유엔 안보리 결의안은 6·25를 별개의 주권국가 간의 전면적 군사행위인 침략전쟁으로 규정하지 않고 평화파괴(breach of peace)로 규정했다. 동시에 유엔은 북한을 별개의 주권국가로 승인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6·25는 한반도 내의 5·10선거가 실시된 지역에 한정해 합법성을 유엔총회로부터 1949년 10월 21일 인정받은 대한민국과 아직 주권국가로 인정받지 못한 북한이라는 실체(국제법적으로는 반도단체) 사이의 내란, 곧 집안싸움인 것이다. 국제법 차원에서 내란은 무력행위 주체를 반도단체 수준에 한정할 때의 규정이고, 이 반도단체를 교전단체로 인정할 때 내전이 된다.

6·25의 경우 초기에 ‘동란’이나 ‘사변’으로 지칭했던 것은 동학란이나 농민반란 등과 같은 수준의 내란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당일 유엔안보리 결의안 82호에서 북한을 평화파괴자로 규정하면서 교전단체가 되어 내전으로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6·25가 침략전쟁이냐 아니냐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유엔의 승인이라는 국제적 기준에 의하면 이는 내전이지 침략전쟁일 수 없다. 그러나 소련이나 중국 등 사회주의권의 외교적 승인을 기준으로 하면 북한은 별개의 주권국가가 되므로 국제법적 기준으로 침략전쟁도 될 수 있다. 남한은 뚜렷한 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어쨌든 전쟁목표를 기준으로 한 통일전쟁 성격규정과 국제법을 기준으로 한 침략전쟁 규정은 서로 배타적이 아니라 양립가능하다. 곧 침략전쟁이면서 통일전쟁이 될 수 있다.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독일 민족의 통일을 위해 침략했을 경우 이는 통일전쟁이면서 동시에 침략전쟁이다. 이처럼 6·25를 남한의 공식 규정인 침략전쟁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통일전쟁이나 민족해방전쟁일 수 있다. 그러므로 침략전쟁을 통일전쟁으로 성격규정 했기 때문에 정체성을 위배했다는 등의 주장은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또한 이 필화사건에서 가장 우려스런 것은 사실논쟁을 이념논쟁과 가치논쟁으로 환원시켜 색깔몰이로 판결을 내리려 한다는 점이다. 필자의 학문적 귀결인 통일전쟁론이 틀렸다면 실증적 차원에서 남북지도부가 전쟁의 목표에 통일을 배제한 객관적 자료를 제시하면 된다. 곧, 북의 민주기지론이나 남의 북진통일론이 통일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을 가졌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입증하면 된다.

또 무력이나 사회주의식 통일은 통일이 아니고 평화나 자본주의식만이 통일이라는 것은 기치논쟁이지 사실논쟁이 될 수 없다. 하나로 합치면 통일이지 누가하면 통일이 되고 다른 누가 하면 통일이 안 된다는 것은 억지 주장에 불과하지 논리와 현실은 아니다.

자본주의식 흡수통일인 독일통일만 통일이고 사회주의식 통일인 베트남통일은 아직도 통일이 안 되고 분단되어 있단 말인지 대답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베트남 사람에게 물으면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받을 것이다. 사람이면 사람이지 백인만 사람이고 황인종과 흑인은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물론 백인종이 황인종과 흑인종보다 우수하다는 인종차별주의라는 가치관이 따를 수는 있지만 이런 인종차별주의조차 흑인과 황인종을 최소한 인간으로는 취급하고 있다.

이 때문에 김대중 전대통령과 수구의 대표격인 조갑제도 6·25를 신라통일과 같이 통일시도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필자는 사실 차원에서 통일전쟁이고 맥아더가 전쟁광이라고 본 것이지 ‘잘됐고 못됐고’의 가치논의는 하지 않았다.

실재 필자의 한국전쟁 성격론은 1993년 <역사비평> 여름호에 “미국과 한국전쟁”이란 논문 발표 이후 시대 흐름에 맞춰 수정·보완 작업이 연속적으로 이뤄져 전쟁성격 규정도 변화 발전되어 왔다. 이 논문에 대해 수 십 개의 우익단체들이 고발했지만 당시 공안당국은 이에 내사를 벌였으나 학문자유 침해 여지가 있다고 내사 종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 “미국과 한국전쟁” <역사비평> 1993년 여름호 계간21호,(195쪽 표2 ‘한국전쟁 5단계’는 민족해방전쟁과 조국해방전쟁 및 계급해방 전쟁으로 성격규정)
: “미국과 한국전쟁”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역사비평사, 1996. (205쪽 표2 ‘한국전쟁의 5단계’에서 민족해방전쟁과 계급전쟁으로 규정)
: “한미관계사:38선에서 IMF까지” 강치원 엮음,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백의, 2000. (‘한국전쟁 5단계설’ 도표에서 65쪽 통일전쟁 처음 등장)
: “한국전쟁과 민족통일: 전쟁의 통일을 넘어 평화와 화해의 통일로” <경제와 사회> 48호 2000년 겨울호(233쪽 표1. ‘한국전쟁 5단계설’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민족해방전쟁, 통일전쟁, 분단고착화전쟁으로 성격규정 함)
: “통일과 한국전쟁” 강정구, <민족의 생명권과 통일>당대, 2002,(98쪽 표1. ‘한국전쟁 5단계설’ 역시 통일전쟁과 민족해방전쟁 및 분단고착화전쟁으로 성격규정하고 북한이 공식적으로 규정하는 조국해방전쟁보다 민족해방전쟁으로 서술하고 있음)“
: “6·15평화통일시대 한국전쟁의 역사적 재조명”(인천통일연대주최 토론회 발표문, 2005년 6월 30일)
(위와 같이 통일전쟁, 민족해방전쟁, 분단고착화전쟁으로 성격규정하고 있음)

여덟, 통일전쟁론을 부정하기 위한 요건의 문제

‘6·25 통일내전론’을 국가보안법이란 법의 잣대가 아니라 이성적이고 학문적으로 부정(否定)하려면 북의 국토완정론이나 남의 북진통일론이 전쟁목적에서 통일을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차원의 실증적 역사자료를 제시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나아가 1950년 10월 7일자 유엔총회 결의안 376호를 폐기시켜야 한다.

이 ‘한반도 통일결의안’은 1950년 10월 1일 한국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을 침공한 시점에서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어 진격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결의안이다.

1950년 6월 25일 유엔안보리 결의안 82호는 6·25를 침략의 개념으로 규정짓지 않고 ‘평화파괴’(a breach of the peace)로 규정했고 38도선 이북으로 북한군이 철수할 것만 결정 했다.

Determines that this action constitutes a breach of the peace,
Calls for the immediate cessation of hostilities;
and Calls upon the authorities of North Korea to withdraw forth with their armed forces to the thirty-eighth parallel. 출처: Resolution 82 Adopted by the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June 25, 1950)

또 1950년 6월 27일자 유엔 안보리결의안 83호 역시 38선 이북으로의 북한군 철수만을 결의하고 이를 위해 군사적 지원을 하도록 결정했다.

Recommends that the Members of the United Nations furnish such assistance to the Republic of Korea as may be necessary to repel the armed attack and to restore international peace and security in the area. 출처: Resolution 83 Adopted by the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June 27, 1950.

이들 유엔안보리결의안이 유엔군의 활동을 38도선 이남으로 제한했기 때문에 38선을 월선하려면 응당 유엔의 별도 결의가 필요했고 이게 바로 1950년 10월 7일자 총회결의안 376호다. 376호 결의안은 38선 이북의 침공을 명시적으로 승인하지 않고 권고사항 1항의 a, b, c 에서 한반도의 평화회복, 통일선거, 통일독립국가의 수립을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아래 인용처럼 권고했다.

1. Recommends that
(a) All appropriate steps be taken to ensure conditions of stability throughout Korea;
(b) All constituent steps be taken, including the holding of election, under the auspices of the United Nations, for th establishment of a unified, independent and democratic government in the sovereign State of Korea;
(c) All sections and representative bodies of the population of Korea, South and North, be invited to cooperate with the organs of the United Nations in the restoration of peace, in the holding of elections and in the establishment of a unified government. 출처: RESOLUTION ADOPTED ON THE REPORTS OF THE FIRST COMMITTEE, 376(v). 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 294th plenary meeting 7 October, 1950).

이는 유엔이 유엔군의 38도선 이북 침공을 통일전쟁으로 규정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유엔은 6·25를 침략전쟁으로 규정하지 않고 ‘평화파괴’라고 서술해 내전(civil war)으로 규정했다. 남한의 공식적 주장인 불법 남침이라는 침략전쟁과는 배치된다. 이 때문에 <한반도 평화조약의 체결>(국제법출판사, 1993)에서 김명기 국제법 전공 교수는 36쪽에서 유엔결의안을 분석하면서 침략전쟁이 아닌 내란으로 해석했다.

“위 결의는 북한의 대남 적대행위가 ‘평화의 파괴’를 구성한다고 했고, ‘침략행위’를 이룬다는 표현은 없다. 이는 당시의 무력을 내란으로 간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침략행위는 국가 간에만 이야기 될 수 있고 국내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김명기,『한반도 평화조약의 체결』국제법출판사, 1993, 36쪽).

이처럼 유엔도 통일전쟁론으로 규정하고 있고 위의 김명기 교수같은 분은 평화협정이 맺어진다하더라도 유엔사령부가 해체될 필요가 없고 유엔군 명의로 미군이 계속 주둔할 수 있는 근거로 바로 이 유엔의 통일결의안 376호를 들고 있을 정도다.

대한민국은 엄연히 유엔가맹국이다. 유엔이 규정하고 지구촌의 대부분 학자들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고, 일반인도 실재 통일목적을 부정하지 않은 이 엄연한 현실에서도 이런 보편주의를 거절하고 국보법의 금과옥조에 따라 나 홀로 식의 통일전쟁 불가론을 고집하는 정신상태는 정밀 검진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아홉, 글로벌 시대와 국내법에 맞게 6·25 전쟁 성격론의 재고를

글로벌 시대를 맞아 6·25 전쟁성격 규정에서도 이제까지 남한의 ‘표준정답’이었던 침략전쟁론을 이제 국제법이나 유엔의 기준에 맞게 글로벌화 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의 법과도 일치시키는 법치주의를 지켜야 한다. 그 대안은 내전형식의 침공이나 통일내전으로 전쟁성격을 재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 본대로 국제법상 별개의 주권국가 사이의 전쟁이 아니면 침략전쟁으로 규정할 수 없다. 유엔은 50년 6월 25일과 27일 결의안에서 6·25를 침략전쟁으로 규정하지 않고 ‘평화파괴’라고 규정했고, 10월 7일 통일결의안 역시 통일을 전쟁목적으로 삼아 한 나라 안의 문제 곧, 내전으로 성격규정했다. 6·25이전에 유엔은 남한만을 38선 이남 합법정부로 승인했지 북을 별개의 주권국가로 승인하지 않아 침략전쟁의 성격규정 자체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국제법적으로 또 유엔의 규정에 따르면 6·25는 침략전쟁이 아닌 내전이다. 내전에서 전쟁주체자의 전쟁목적이 통일이었기에 통일전쟁이다. 국제법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것을 일방적으로 또 이데올로기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보편주의 원칙과 요즘 금과옥조처럼 들먹이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다. 설사 냉전기간에는 그랬다하더라도 이제 탈냉전-글로벌시대에는 이런 구각의 굴레에서 응당 벗어나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국내법과도 상치된다.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로 규정하고 있다. 또 국가보안법에 의해 북한은 주권국가가 아닌 반국가단체로 판시되어 있다. 남한 법체계는 최소한 북한이 유엔에 공식적으로 가입한 1991년 이전까지는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고 불법적인 반국가단체였다.

국내법에 의하더라도 1991년 이전에 발생한 남북 간의 전쟁인 6·25는 별개 주권국가 간의 전쟁일 수 없기 때문에, 곧 주권국가인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의 영토 안에 존재하는 반국가단체에 불과한 북한과의 전쟁이기에, 침략전쟁이 성립될 수 없고 단지 내전일 수밖에 없다.

군사평론가인 김성전 예비역 중령이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보수 세력이 6·25를 침략전쟁으로 규정한다면 이는 북한을 반국가단체가 아닌 주권국가로 인정하는 셈이다. 이는 보수 세력들이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국가보안법을 위배한 것을 의미한다. 국가보안법을 엄밀히 적용한다면 이들은 모두 사법처리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보수 세력이 국내법을 어기고 6·25를 침략전쟁으로 보면서 통일의 필요성을 이야기 하거나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통일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김성전의 지적처럼 스스로 모순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만약 이들이 국내법에 맞게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침략전쟁을 부정하면, ‘6·25는 내전이다’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또 통일전쟁이 되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이 경우 6·25를 통일내전이라고 학문적 결론을 내린 필자의 전쟁성격 규정과 완전히 동일한 주장을 펼치는 것이므로 필자에 대한 사법처리 요구는 불가능하게 된다.

이처럼 6·25 통일내전에 대해 사법처리 운운하는 이 땅의 일부 세력은 국제법이나 국내법을 초월한, 영어식 표현으로는 over and above either the internal or external laws= the lawless= outlaw인 셈이다.

“북한을 독립된 주권국가로 본다면 수구세력들은 북한이라는 실체를 국가로서 인정해야 하는 모순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수구세력들은 통일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한 국가가 또 다른 국가를 통일해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무력으로 통일해야 한다면 그것은 침략전쟁으로 국가를 몰아넣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구세력들이 북한을 독립된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전을 누가 먼저 일으켰건 목적이 통일이라면 통일을 위한 내전이 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강교수에 대한 처벌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출처: 김성전, “강정구 전에 수구세력부터 처벌하라!”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게시판, 2005-09-05 05:36:16 From : 221.145.82.104

이제 이런 모순된 자화상에서 우리 스스로 벗어날 때가 되었다. 더구나 세계화와 글로벌 스탠더드 화를 밥 먹듯이 외치는 오늘의 시점에서는 말이다.

열, 마무리말

필자는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맥아더 컬럼 들머리에 맥아더 동상 철거공방에서 폭력몰이와 색깔몰이는 이제 그만하고 냉정한 이성적 논쟁을 하자는 당부를 했다. 이를 비웃기나 하듯이 논증이나 설득이나 설명이 아니라 색깔몰이 일색으로 또 일부에서는 폭력몰이로 결판을 내고자 한다. 여기에 공안당국마저 사법처리 운운하고 가세하는 기막힌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올해는 해방과 분단 60년 환갑의 해다. 환갑은 지난 일생을 성찰하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전환의 출발이다. 이번 필화사건을 마지막 소모적인 진통으로 마무리시키고 분단 60년에 즈음해 우리 남북 모두는 잘못된 지난날을 겸허히 반성하고, 시야를 남북 한 쪽에 고착시키는 외눈박이가 아니라 전 민족 차원으로 넓히고, 외세가 강제한 분단과 적대를 직시하고, 19세기 말의 각축전이 재연되고 있는 엄중한 오늘의 동북아정세를 남북이 함께 대처하고, 평화와 통일을 이루기 위한 실천에 나아가기를 염원하고 촉구한다.

끝으로 의도하지 않게 강의에 차질을 빚고 대학 업무에 불편을 끼친 점 등 각종 사항에 대해 동국대 학생과 동국대학교 당국에 유감을 표한다.



유첨:
“남·북한 농지개혁 비교연구: 민족주체적 시각에서”
-강정구, 한국산업사회연구회편 <경제와 사회> 통권 7호 1990년 가을호 204~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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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동시에 조선은 역사전환기 또는 사회변혁기에 돌입한다. 그런 왜 이런 역사전환기를 맞지 않을 수 없었는가에 대해 구조적 요인과 국면적 요인을 검토하도록 하겠다. 순수해방공간에서 조선은 일제가 남겨놓은 사회구조를 유산으로 받았고, 이 유산의 기초 위에 구성되었던 계급구조에 변동을 겪었고, 유산으로 받은 사회경제구조를 변혁시킬 수 있는 주체적 역량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의 순수해방공간의 조선은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역사행로를 걸었던 것임이 거의 확실시된다. 즉 외세의 개입 없이 순수한 내적인 역동력에 의해서 조선사회가 스스로의 길을 걸어갔더라면 그것은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역사통로였다.

진보적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대략적인 개요는 ① 농지개혁을 통해 소작제를 일소하여 반봉건 착취제도를 근절시키고, ② 중요산업이나 기간산업 들을 국유화해서 독점자본주의 착취를 청산하고, ③ 경쟁자본주의는 육성하여 생산력 발전을 꾀하고, ④ 친일파를 숙청하고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면서 동시에 어떠한 사대주의도 배격하는 반제국주의 노선을 택하고, ⑤ 복수정당을 허용하고 표현·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⑥ 농민과 노동자 등 피지배계급의 경제적 이익과 착취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다.

이 진보적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인민 민주주의였다고 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점진적인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고 볼 수 있겠다.(각주1: 인민민주주의란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인민대중의 혁명적 정권으로 설명되어진다. 이는 “2개의 상이한 사회구조의 영속적 또는 공존적 형태는 아니면 자본주의적 요소를 순차적으로 제거하고 일소하기 위한 형태임과 동시에 장래의 사회주의 경제의 기초를 발전?강화시키기 위한 정치형태이다.” 고희정 지음, 이남현 옮김, 『북한경제입문』, 청년사, 1988, 225쪽)

그럼 순수해방공간에서 왜 조선사회는 이러한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했고, 또한 외세의 간섭이 없었더라면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 구비되었던 것으로 판단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선 첫째로 지적해야 할 사항은 식민지로부터 전승한 경제적 토대가 사회주의 이행에 적합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해방이 되는 시점에서 철도, 항만, 광산 등은 거의 100%, 다른 중요산업은 90% 정도가(공정 자본금 기준으로는 93%) 토착조선인의 소유가 아니라 일본인 또는 조선총독부의 소유여고, 농지의 경우도 거의 18% 정도가 일본인 또는 조선 총독부의 소유였다.

이 사실은 해방과 동시에 이들 중요산업의 90% 이상과 농지의 18% 가까이가 하루 아침에 소유주가 없는, 즉 임자 없는 재산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생산수단은 일제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민중을 착취함으로써 형성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이 전사회나 국가의 공공소유화되어야 된다는 점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경제적 특성은 해방 후 활성화하기 시작한 노동자자주관리운동이나 소작제의 실질적 와해가 확산되는 물적 토대를 제공했다.

둘째, 해방공간과 동시에 식민지 패퇴라는 요인에 의해 초래된 계급구조의 불균형이라는 점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중요산업자본의 90% 이상이 일본인 소유였다. 이것은 독점자본이나 대규모자본은 일본인 자본가에 의해 장악되고 조선인 자본가는 거의 전무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소규모자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지도적 자본가는 일본인으로 구성되었기 때문데, 일본인이 패퇴한 순수해방공간에서는 계급구조상 자본가 없는 노동자의 형성이라는, 자본주의 계급구조상 불균형적인 계급구조형태를 띠게 되었다. 따라서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통제가 불가능해지는 요인이 계급구조상으로 형성되었고 일부 지주와 소작인 관계도 이러한 모습을 띠었다.

셋째, 토착지배계급인 조선인 지주와 자본자의 대부분은 친일 행위로 인해서 지배 계급으로서의 정통성을 상실하여 피지배 계급에 대한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없었다. 일제시대의 철저한 민족 차별정책과 지배전략에 의해 토착 조선인이 대자본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은 지극히 일부에게만, 친일행위를 한 경우가 허용되었다.

그래서 조선인 자본가는 지극히 수적으로 제한되었을 뿐 아니라 대부분 친일파라는 낙인이 찍혔다. 기타 대부분의 자본가나 일부 지주들은 그들의 경제적 지위를 지속시키기 위해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친일 행위를 강요 받았고 또한 이에 순응하였다. 일본인 지배 계급의 와해로 생긴 지배 계급의 지배력에 대한 공백을 구래의 조선인 지배 계급이 메꿀 수 없었던 요인은 특히 조선인 자본가 계급의 저형성(underevelopement)과 친일 행위로 인한 정통성 상실이라고 볼 수 있다.

넷째, 식민지 통치기간 동안 조선인 구지배계급은 경제적 지배 계급으로서의 지위는 일본인 지배 계급과 공유할 수 있었지만 정치적 지배 계급의 역할은 부여받지 못했다. 그래서 해방과 동시에 정치권력이 곧바로 와해되고 그것을 계승할 정치적 지배 계급이 육성되지 않았기에 국가기구, 그 중에서도 경찰과 군대의 통제가 불가능해져 결국은 폭력수단의 독점이라는 국가 기구의 중요한 고유 영영이 상실되었다.

이상은 주로 경제구조와 계급구조에 관련된 객관적 요인에 치중하여 요인 분석을 시도한 것이다. 해방공간을 역사 전환기로 보는 것은 이러한 객관적인 조건이 구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일본인 지배 계급의 위치를 계승해서 사회 통제를 수행하기 어렵게 만든 요인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러한 객관적 조건이 변혁주체세력의 자동적인 형성과 역량강화로 연결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계급이익이나 집단이익의 실현은 의식적인 조직운동과 실천운동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이러한 조직운동, 의식운동, 실천운동을 통해서 계급이나 집단 역량이 강화되고 이익실현을 위해 다른 계급과의 활발한 계급 투쟁을 전개할 때, 즉 주관적으로 변혁의 주체를 형성하고 실천할 때에 변혁기나 역사 전환기를 맞이할 수 있다. 이제 주관적으로 계급 형성과 계급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주체적 조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일제시대에 활발했던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통해서 노동자·농민의 역량이 성숙했다. 특히 1930년대 공산당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가 자생적인 운동으로 전화한 적색 농민운동과 적색 노동운동 등은 커밍스의 해방 후 임시인민위원회의 분석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해방 후 노동자 자주 관리나 소작제 철폐, 인민위원회에 의한 통치 지배권 장악 등을 수행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둘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급진민족주의자들과 노동자·농민들 간의 연대가 이루어져 노동자·농민이 급진화되었다. 급진민족주의자의 노선은 민족해방운동이 단순히 일본인 지배계급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조선인 지배로 대처하는 사람바꿈식의 독립운동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일제에서 해방될 뿐만 아니라 조선인 지주와 자본가의 착취와 수탈로부터도 해방되는 구조바꿈을 지향한, 즉 민족운동과 계급운동의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급진성이 노동자·농민들이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 조선인민공화국, 지방인민위원회,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전국노동조합평의회 등의 권력 기반을 제공한 주요인이다.

셋째, 민족해방투쟁에서 1920년대 후반 이후 급진민족주의자들이 민족 개량주의자나 문화민족주의자를 압도하여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독립운동주체라는 정통성을 확보함으로써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세력이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고, 실제로 건국동맹 등의 기존조직을 기반으로 건국준비위원회, 조선 인민 공화국, 지방 인민위원회 등의 형성으로 실질적인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미점령에 의한 반혁명과 반공산주의정책이 테러통치와 폭력에 기반하여 강력히 전개되지 않았다면 이들 급진민족주의자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정치권력이 장악 및 통치되었음에 틀림없다.

넷째, 커밍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일제식민지 기간 동안의 인구이동은 기존의 토착조선인 지주들이 종래의 가부장적 또는 보호자적인 전통관계로 소작 및 농민들을 통제할 수 있는 기반을 무너뜨렸다. 징용이나 징집, 고향을 등지고 일본, 북한, 만주의 탄광, 공업지, 농지 등으로 또 징집 및 징용으로 전쟁터에서 비정통적이고 비가부장적인 조직과 환경 속에서 생활한 이들 귀향인들은 더 이상 농민도 아니었고 또 집단 작업장에 배치되어 있는 정규 노동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어느 정도 급진사상을 소화하고 있었다. 이들이 해방 후 해외에서 귀환하면서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의 인적 자원 동원 능력은 고양될 수밖에 없었다. (각주2: 이에 대해서는 브루스 커밍스 지음, 홍주환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청사 참조 바람.)

위와 같이 주체적 요인을 살펴보았다. 이들 객관적·주체적 요소들은 순수해방공간을 역사 전환기, 즉 사회 혁명기로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변수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원인변수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혁명이나 변혁을 촉진시키는 촉진변수(reinforcing variable)의 역할도 중요하다.

주로 촉진변수의 역할을 한 국면적 요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총독부가 급진 민족주의 세력인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한 여운형 집단에게 해방정권을 이양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한민당 계열의 민족개량주의자인 송진우나 김준연 등에 해방정권 이양교섭을 총독부에서 제의했다는 전혀 근거 없는 주장도 나오고 있으나 이것은 고도의 정치적 음모의 일환일 가능성이 놓다.

조선총독부는 급진민족주의자에게 행정권을 이양함으로써 조선민중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여 궁극적으로는 일본인의 안전을 어는 정도 기해보자는 현실적 대안을 제시했고 이러한 조건에 가장 알맞는 조선인이 민족정통성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는 민족개량주의자에 대한 행정이나 치안권 이양은 조선 민중의 엄청난 분노와 반발을 야기하리라는 것을 총독부는 감안했음에 틀림없다.

치안행정권을 이양 받은 급진 민족주의자의 일환인 건준은 조선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획득했고 동시에 정치범, 즉 대부분의 민족독립운동가를 석방했고 치안확보를 위한 치안대의 조직 등 국가고유기구인 폭력사용권 등을 확보함으로써 급진적인 사회 변혁을 수행할 기반을 재빨리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건준이나 나중에 창설된 조선 인민공화국은 전국 규모의 건준 지부, 지방 인민위원회가 비록 시민사회 내의 자생적 요인에 의해 창설되었다 하더라도 이들 지방조직의 구심적 역할과 지주의 역할을 함으로써 지방의 시민사회가 급속히 면혁역할을 고양시킬 수 있었다.

둘째, 45년 8월 15일 일본이 정식으로 항복하기 이전 단계에서 소련은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조선 땅에서 일본군과 직접적인 전투행위를 전개했다. 소련의 대일전 참전의 주목적은 물론 조선해방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조선의 민족 해방을 위해 직접 전투행위를 했다는 사실은 장차 소련의 역할이 크고, 또 급진주의자의 활동 영역이 더 넓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 있게 했다. 실제 북한의 경우 소련군의 전투 행위와 그 이후 주둔은 북한의 반제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에 유리한 지형을 제공해주었다.

이제까지 열거한 주·객관적 및 국면적 조건에 의해 조선 사회는 급진적인 역사전환기를 맞았다. 이러한 내적인 역사 전개 방향에 대해서, 즉 급진 민족주의자들이 해방된 조선이 나아갈 방향인 테로스(Telos)로 설정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나아갈 필연성을 확인하는 자료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1945년에 작성한 미국무성 보고서는 “경제적, 정치적 상황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할 용이한 조건을 제공할 것”과 “러시아 지원의 사회주의 정권이 한반도에서 쉽게 인민들의 지지를 획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각주3: U.S State Dept, Foreign Relation of the United States, 1945, V.6, 561~563쪽)

또한 1946년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남·북한을 방문했던 폴리(Pauley)특사도 그의 보고서에서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공산화되기 쉬운 경제적 조건을 가진 나라라고 주장하면서 시민사회에서 일고 있는 이러한 급진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귀속 재산을 미국의 전리품으로 계속 확보하여 이들 귀속 재산이 인민위원회(공산당이라고 표현했음)에 귀속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1946년 5월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조선민중이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를 해방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보고 있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미점령군이 한반도에 상륙하고 반혁명, 반공산주의를 위한 테러통치와 이데올로기 조작을 수행한 지 9개월이 지난 뒤에 실시된 여론조사임에도 불구하고(즉 순수해방공간이 아니라 반혁명, 반공정책을 시행한 외세의 개입이 장기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응답자의 14%가 자본주의, 4%가 공산주의, 8%가 모른다, 70%가 사회주의를 선호했다.

비록 한정된 여론조사라 할지라도 응답자의 4분의 3이상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지했다는 것은 순수해방공간에서의 역사추동력이 어느 방향을 지향했는가를 극명히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각주4: 강만길, “분단의 근본원인”, 『통일론 강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통일위원회 편, 1989, 중원문화 17쪽)

이와 같이 미군정의 자료 외에도 3년간 지속된 미점령군 군사통치에 관한 보고서 여기저기에서 이러한 급진운동인 급진성향이 팽배했음을 나타내는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다.

순수해방공간의 역사전개방향을 가늠하는 좋은 지표는 건준, 조선인민공화국, 지방인민위원회, 여러 중요 정당들의 강령을 검토해보는 것이다.

가장 보수적인 집단의 하나인 김구계의 상해임시정부(이하 ‘임정’)의 건국강령만 하더라도 토지국유화, 중요산업 국유화, 무상교육 등 진보적인 정책을 천명했고 이를 검토한 미국무성은 임정이 “비록 공산주의는 아니지만 좌익이데올로기를 지향하고 비혁명적인 과정을 통해서 반(半)사회주의 경제를 제창한다”라고 평가했다. (각주5: U.S. State Dept, R & A No. 1028, "Recent Korean Documents Relating to the Korean Provisional Govemment in Chunking", Aug. 2, 1942, 4쪽.)

대부분이 구지배계급인 지주와 자본가로 구성되어 있고 친일·친미파의 소굴이었던 한민당을 제외하고 모든 우익정당들조차 비록 사회주의를 지향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천명했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고려할 때에 순수해방공간에서의 역사진로는 진보적 민주주의이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농지 개혁에 관한 한민당의 강령은 농지제도의 합리적인 재편성이라는 추상적이고, 필요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이현령비현령식(耳縣鈴鼻縣鈴)의 것이었다. 이것은 모든 정당들이 농지개혁에 관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는 순수해방공간의 시대적·사회적 요구에 직면하여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정강 아닌 속임수 정강을 내놓은 것이었다.

우리는 순수해방공간의 역사추상형은 사회주의 지향이라는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것을 이제까지의 논리에서 충분히 도출해낸 것 같다. 그러면 실제로 진행된 역사의 흔적은 어떤 것인지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한마디로 이야기 한다면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실현 시킬 역량을 충분히 갖춘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가 미점령군의 본격적이고 성공적인 반혁명적·반사회주의 캠페인 이전에는 모든 조직을 압도하였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경험적인 자료들은 우리 현대사의 구석구석에서 너무나도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필자는 조선 인민공화국의 압도적 우세와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 그리고 이와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는 극우보수세력을 비교한 미군정의 자료를 간단히 인용함으로써 순수해방공간은 인공의 주도하에 진보적 민주주의로 또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역사추상형을 띠었다고 주장하려 한다.

그들(인민위원회)은 모든 수준에서 통치조직을 가졌고 실제로 많은 지역에서 노동, 농업, 산업, 경찰 등 여러 분야의 기관장을 포함하고 집행위원회를 통하여 실질적인 정부통치기능을 수행했다. 농촌지역을 광범위하게 답사한 후 언더우드 박사는 ‘인공’이 ‘남’조선의 전역을 통틀어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활동적인 정치조직이라고 기술했다.(각주6: History of The State Armed Forces in Korea, "Part Ⅱ, Korean Politics and People", p.11.)

비록 그들 좌익주의 강세가 자발적인가 또는 강제적 성격인가 하는 것은 추측의 문제이지만 분명한 사실을 이들 좌익집단들이 주로 인민공화국의 조직력을 통해서 남조선 인민의 다수를 대표한다는 것이다.(각주7: U.S Armed Forces in Korea, "G-2 Weekly Reports", No. 23,24, 돌베개, 『미군정보고서』 11권, 311쪽.)

비교적 잘 알려진 명사들이 ‘한민당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그 조직은 매우 약하고 층이 얇다. 아마도 머리는 크지만 몸뚱아리는 작은 거인과 같은 조직이 한민당인 것 같다. 아마 한민당은 미군사 정부와 밀접한 동맹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각주8: “G-2 Weekly Summary", No.12, No.2, 돌베개, 위의 책, 11권,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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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구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unikorea@cv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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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을 학자라 할지니... ^^
멋지시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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