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고종석씨와 강준만 교수의 글...
‘고종석’식 진보주의를 위하여
‘개인주의를 거친 사회주의’를 이론 없이 곧장 실천으로 들어간 ‘진보주의자’…한국 지식계의 축복, 그의 엄격한 책임 윤리가 곳곳에 스며드는 세상이 오길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께 질문을 하나 드리겠다. 민주노동당(민노당)이 창당 기념일 행사로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여론 형성에서 민노당의 발전과 성장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지식인에게 감사장을 수여한다면, 1순위로 누구를 꼽겠는가?
가장 효과적인 민노당 지지
나는 고종석이다. 고종석의 반열에 오를 만한 다른 지식인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의 이런 주장을 염두에 두면서 최근 고종석이 펴낸 <바리에떼: 문화와 정치의 주변 풍경>(개마고원)이라는 책을 읽기를 권한다. ‘사람’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고종석의 ‘복잡성’에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아니 무심코 읽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나는 자칭 ‘고종석 전문가’로서 그가 얼마나 ‘복잡한 사람’인지에 대해 이제부터 예비 지식을 드리고자 한다. 고종석에 대한 칭찬도 비판도 아니다. 담담하게 해부해보는 것이다.
△고종석은 진보마저도 책임 윤리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래서 선뜻 “나 진보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다.(사진/ 한겨레 장철규 기자)
고종석은 “개인적으로 나는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당연히 나는 진보 정당의 지지자가 아니다”(203쪽)라고 했다. 고종석은 진보주의자가 아닐뿐더러 집단주의를 혐오한다. 그는 “만국의 개인들이여, 흩어져라! 흩어져서 싸우라! 민족주의의 심장에, 모든 집단주의의 급소에 개인주의의 바이러스를 뿌려라!”(30쪽)라고 선동적인 개인주의 선언을 한 바 있다. 고종석이 낙관적 열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나는 염세주의자에 가깝다.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탐욕과 포악과 비굴에서 사람에게 맞설 만한 동물이 있을지 모르겠다”(291쪽)고 털어놓았다.
이 정도면, 고종석을 잘 모르는 분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아니 그런 사람에게 왜 민노당이 감사장을 줘야 한단 말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고종석만큼 효과적인 민노당 지지를 역설한 지식인은 찾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이다.
민노당 당원이거나 당원은 아니더라도 민노당 색깔을 가진 진보적 지식인들은 평소 글쓰기 활동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민노당 당원들도 잘 알아듣기 어려운 용어로 논문식 글을 쓰는 지식인들이 다수다. 대중적인 글을 쓰는 지식인들도 있지만, 이들은 보수(자유주의 포함) 정당 비판에만 몰두한다. 보수 정당 비판이 곧 민노당 지지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충분히 입증된 것 같은데도, 이들은 왜 민노당을 지지해야 하는지 겸손하고 간곡한 자세로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보수 정당 지지자들에 대한 호통, 야유, 조롱이 주요 메뉴다. 비극은 많은 민노당 당원들이 그걸 말리면서 “손님 쫓아내지 말라”고 고언을 하는 게 아니라, “아이고 속 시원해라” 하면서 즐긴다는 사실이다.
호통, 야유, 조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다. 차분하고 정중한 설득보다는 그게 더 필요할 때도 있고 효과를 낼 때도 있다. 문제는 시종일관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하나의 양식으로 굳어져 본말이 전도되는 사태다. 나를 위한 진보인가, 민중을 위한 진보인가?
고종석은 시종일관 겸손하게 민노당 지지를 설득한다. 그는 한국 사회의 극우 편향을 개탄하면서 ‘이념적 정상화’를 위해 자유주의자들이 민노당에 표를 던져야 한다고 타이르고 호소한다. 이 책에도 그런 호소가 나와 있지만, 고종석이 정치를 주제로 쓴 많은 글엔 명시적·암묵적인 민노당 선전이 들어 있다.
고종석이 묘한 사람인 건 분명하다. 한국 사회의 야만에 대해 그 어떤 진보주의자보다 더 진보적 의분을 표출해왔으면서도, 자신은 진보주의자가 아니라고 딱 잡아떼니 말이다. 문학평론가 백철은 고종석의 소설집 <제망매>에 쓴 발문에서 고종석의 묘한 이념 지향성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한국형 진보주의의 리트머스 시험지
“그는 우리나라의 어떤 ‘좌파들’보다도 더 좌파적이었고, 어떤 ‘우파들’보다도 더 우파적이었다. 인간과 세상의 진보를, 아니 진보의 험난한 좌절들을 진실로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그는 충실한 좌파였고, 많은 좌파들을 부끄럽게 만들 줄 안다는 의미에서 또한 충실한 우파였다.”
사회과학적 분석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보자. 고종석은 한국형 진보주의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진보 세력이 ‘고종석 시험’을 통과하지 않고선 큰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 시험의 이름은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 정립 문제다.
개인주의는 오랫동안 사회주의와 갈등 관계를 유지했다. 사회주의에 호의적인 사람들도 개인주의 때문에 사회주의에 대해 유보적 자세를 취하곤 했다. 예컨대, 미국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사회주의에 공감했지만 사회주의가 개인과 천재에 반대하는 것을 싫어했다. 가치 있는 것은 오직 개인뿐이라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에게 그런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1891년에 낸 <인간의 영혼과 사회주의>에서 “우리가 사회주의를 통해 이르고자 하는 것이 개인주의”라고 주장했으며, 조레스는 1898년에 낸 <사회주의와 자유>에서 “사회주의는 완전하고 논리적인 개인주의”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를 개인주의의 논리적 완성으로 보았으며, 빅토르 바슈는 1904년에 낸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에서 “일관성 있는 개인주의는 사회주의로 귀결된다”고 주장했다.(알랭 로랑의 <개인주의의 역사>)
△고종석은 참여정부의 파산을 염려해 열린우리당 지지를 역설하고 다른 대안으로 민주노동당 지지를 제시했다. 2003년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개최된 열린우리당 창당대회.(사진 / 한겨레 김정효 기자)
한국에서 ‘개인주의를 거친 사회주의’를 시사한 이는 한양대 교수 임지현이다. 그는 “낡은 전통에 가위 눌려 있는 남한의 좌파 지식인들은 ‘사회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를 거친 사회에서만 건설할 수 있다’는 트로츠키의 회한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 것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론 없이 곧장 실천으로 들어간 대표적 인물이 바로 고종석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종석이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의 진보주의자들 가운데 사회주의자는 얼마나 되겠는가? 고종석은 진보주의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고종석은 한사코 자신이 진보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가? 개인주의와 진보주의가 양립하지 못하는 한국의 진보주의 풍토를 정면 돌파할 뜻이 없기 때문일까? 나는 그게 고종석의 개인주의가 요구하는 ‘책임 윤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책임 윤리가 박약한 편이다. 책임 윤리란 어떤 일을 할 때 나타난 결과뿐만 아니라 예상 가능한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윤리의식을 말한다. 옳은 일이니까 결과에 개의치 않고 무조건 밀어붙인다는 진보주의는 책임 윤리가 없는 모험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선 곧잘 모험주의가 진보주의로 통용되기도 한다. 독재정권 시절에 형성된 습속이 민주화가 된 이후에도 지속된 탓이다.
이념을 떠나 일상의 차원에서도 책임 윤리가 강한 사람은 공직을 맡는 걸 두려워한다. 책임 의식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비극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공직자, 특히 고위 공직자들의 책임 윤리 부재 또는 박약을 들겠다. 대부분 고위 공직을 출세로 생각한다. 그건 ‘출세’가 아니라 ‘봉사’하는 거라고 반박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봉사하기 위해 치열한 로비를 하고 남이 자신보다 좋은 봉사 기회를 갖게 되면 배 아파하고 헐뜯는 사람들이 왜 그리도 많단 말인가?
책임 윤리가 강한 사람은 함부로 공적 단체를 만들지도 않는다. 공공의 목적을 위한 단체면 성공 가능성을 검토하지도 않은 채 무조건 만들고 보는 게 우리 시민사회의 풍토다. 하다 안 되면 때려치우면 그만이다. 책임? 공익을 위한 이타적 활동에 무슨 책임? 책임 윤리가 강한 사람은 이타성을 면죄부로 내세우는 그런 반문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책임 윤리 유전자를 가진 고종석이 영원히 공직을 맡거나 상시적인 공적 단체를 만드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본다. 물론 아닐 수도 있고,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여태까지 내가 분석해온 고종석은 그렇다는 것이다.
선뜻 “나 진보요!”라고 하지 않는 이유
고종석은 진보마저도 책임 윤리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선뜻 “나 진보요!”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진보를 고위 공직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백철의 평가를 다시 읽어보라. 가슴에 와 닿는 날카로운 지적이다.
고종석은 과격한 개인주의 선언을 하였지만, 나는 실천에선 내가 고종석보다 더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내가 이기주의에 더 충실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 2003년 12월 나는 고종석과 민주당 분당 문제로 논쟁을 한 바 있다. 이와 관련된 글이 <바리에떼>에 실려 있으므로, 이 이야기를 좀 해보자.
민주당 분당에 비판적이었다는 점에선 나와 그의 생각은 같았지만, 전체 또는 집단을 생각한다는 점에선 고종석은 나보다 한 수 위였다. 고종석은 “가난한 부모가 창피하다며 집을 뛰쳐나갔다가 세상에서 따돌림당하는 자식을 거두어 보살피는 어미의 심정으로 호남 유권자들은 신당을 감싸야 한다”(187쪽)는 주장을 폈다.
나는 이런 ‘부모·자식·어미’론이 부적절한 유추라고 생각한다. 고종석이 ‘참여정부의 파산’을 염려해 열린우리당 지지를 역설하고, 다른 대안으로 민노당 지지를 제시한 건 나로 하여금 “이 양반 개인주의자 맞나?”라는 의문을 갖게 했다. 고종석은 나의 주장이 ‘민주당 지지’를 ‘암시’한다고 해석했지만, 나는 “이 양반 진짜 개인주의자 맞나?” 하는 생각을 했다. 혹 ‘대안 중독증’이나 ‘독수리 5형제 신드롬’에 빠져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했다.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노무현의 해체주의는 ‘창조적 파괴’라고 예찬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그건 노무현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란 말이냐고 내심 쏴붙였다.
나는 열린우리당은 내가 반대한 정당이므로 열린우리당이 파산하건 말건 아무런 책임 의식이 없는 반면, 고종석은 대선에서의 투표에 대한 책임을 말하면서 노 정권에 대한 책임 윤리마저 역설하는 게 아닌가! 고종석이 자유주의자요, 개인주의자라고?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노무현은 자신의 약속을 뒤집고 민의를 폄하하면서 결과야 어떻게 되든 모험주의라고 불러주기조차 어려운 도박주의로 치달리는데도 고종석은 그런 노무현까지 어미의 마음으로 껴안자고 역설했으니, 나로선 “오지랖도 참 넓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종석은 “노무현이 아무리 나빠도 최병렬이나 이회창보다는 수백 배 덜 나쁘고, 전두환보다는 수만 배 덜 나쁘다”(199쪽)는 논리를 내세워 특검법 통과에 한나라당과 공조한 민주당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나는 여기서 고종석의 평소 ‘쿨함’이 사라졌다는 게 흥미롭다. 이는 그가 ‘개인’보다는 집단적 ‘대의’를 앞세운 탓이리라.
나도 평소 대안을 어지간히 강조하는 편이지만, 잘못된 것을 비판함에 있어서 늘 그 결과와 대안까지 미리 생각하고 비판에 임하진 않는다. 그런데 고종석은, 비록 그가 ‘국가’와 ‘민족’이라는 단어를 혐오할망정, 사실상 국가와 민족을 염려하는 지극한 애국심을 발휘했으니 이 어인 일인가.
<바리에떼>엔 복거일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에 대한 성실한 반론이 실려 있다. 87쪽에서 137쪽에 이르는 긴 글이다. 고종석 스스로 “식민지 시기의 역사적 복권을 통해 민주주의 운동의 정통성을 흔들려는 온갖 ‘경제론’들의 급소를 이 글이 비교적 정교하게 움켜쥐었다고 나는 판단한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그 이상이다. 최근 홍수처럼 쏟아져나오고 있는 식민지 시절에 대한 모든 논란에 대해 명쾌한 교통정리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종석은 복거일을 내내 비판하지만 그의 비판은 더할 나위 없이 성실하다. 나는 복거일에 대한 과분한 대접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복거일은 철저한 사회진화론자이며,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니 보수주의니 하는 건 편의적으로 동원되는 것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고종석이 복거일의 자기 교정 가능성에 대해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건 자신이 복거일로부터 배운 점이 있다는 것에 대한 책임 윤리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닌가 의심하곤 한다.
내려다보는 일부 진보주의자에게
고종석과 같은 희귀한 지식인이 있다는 건 한국 지식계의 축복이지만, 내가 정작 높이 평가하는 그의 미덕은 매사를 깊이 꿰뚫어보는 시력이다. 내 기준으론 보아선 과도할망정 고종석의 엄격한 책임 윤리가 곳곳에 스며드는 그런 세상이 되면 좋겠다. 물질적으론 낮은 곳에 있을망정 정신적으론 높은 곳에 서서 진보 아닌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일부 진보주의가 고종석형 진보주의로 교체되는 그런 세상은 언제 올 것인가?
‘거리두기 실패’는 양이 아닌 질 646호 성한용 선임기자의 반론에 부쳐
<한겨레> 성한용 선임기자의 반론에 감사드린다. 나는 성 선임기자가 노무현 정권을 비판한 칼럼·기사들이 많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성 선임기자는 “강 교수가 이런 칼럼이나 기사를 혹시 일부러 외면한 것이라면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반은 인정한다. ‘일부러’의 의미가 이중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제기했던 문제는 ‘거리두기’의 양보다는 질이었기에, 성 선임기자가 노 정권을 비판한 칼럼·기사들이 많이 있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집중적으로 문제 삼은 노 정권의 ‘남 탓’은 성 선임기자의 다른 칼럼·기사들의 비판 주제와는 다른 것이었으며, 이런 성격의 ‘거리두기’는 전체적 평균보다는 각 글 안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따라서 내가 문제 삼은 글들이 거리두기에 실패했다는 나의 비판은 유효하다고 본다. 그러나 내 글이 방금 설명한 원칙을 밝힘으로써 성 선임기자의 평소 저널리즘 활동을 잘 모르는 독자들이 오해할 소지를 차단해야 할 노력을 하지 않은 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 점 죄송하게 생각한다. 그렇게 했더라면 훨씬 더 설득력이 높은 글이 되었으리라 믿기에 나도 아쉽다. <한겨레>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계량화된 수치를 내놓을 순 없지만, 적어도 정치적 논조에선 나는 성 선임기자가 <한겨레>의 대표 필진급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뒷받침할 나름의 근거가 있다. 사실 이런 문제 제기를 염두에 두고 <한겨레>의 사설 분석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성 선임기자의 반론처럼 양의 균형이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어 좀더 생각해보기로 했다. 노 정권의 집요한 ‘언론 탓’과 나 같은 사람의 시비 사이에서 시달리는 성 선임기자의 노고에 위로와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
'잡다한것 > 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교육 참고 도서 (0) | 2010.06.25 |
---|---|
EBS 멘토에 나온 자기주도성 체크리스트 (0) | 2010.06.25 |
좋은 사진을 찍는 법 (by Photographer 박종우) (0) | 2010.04.14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0) | 2010.03.12 |
함께 달린 어린이집 관련 글 (0) | 2009.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