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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여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
폭동이라고 불리우는 4·3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1948년 4월 3일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여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 바로 제주 4.3사건이다. 미군정 초기부터 지속되어온 인민위원회 및 대중들과 경찰, 우익단체간의 갈등이 무장봉기로 폭발하였다.
한라산을 근거로 하는 유격전으로 발전, 49년까지 계속되어 이에 대한 진압작전에 나선 토벌대는 초토화작전을 전개, 유격대와 주민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공격, 집단 학살하여 수많은 인명이 학살당했다.
한사람의 죽음도 그렇게 극진하게 장래를 치루는 법인데, 난리를 겪으면서 염조차 못하고 매장된 경우가 부지기수일진데 50년 가까이 구천을 맴도는 원귀들을 달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역사를 정립하고 국민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데 정치적인 계산이 있어서는 안된다. 오직 실체적 진실의 발견과 명예회복으로 화합차원의 대책마련에 모두 예지를 모아야 하며 어느 쪽에 위치하였던지간에 악몽과도 같았던 마음으로 전환하여 아픈 역사의 앙금을 하루 빨리 걸어낼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용어문제

제주도 폭동사건 : 1948년 4월 3일 남노당의 사주아래 제주도 한라산에서 공산무장폭도가 봉기한 사건(국사대사전, 교각 도서출판)
제주 4.3사건 : 1948 4월 3일을 기해서 제주도 전역에 걸쳐 남조선노동당 계열의 좌익분자들이 일으킨 대폭동(한국민족문화대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제주 4.3은 위와 같이 용어조차 정립되지 못한 채 '난리, 사태, 소요, 폭동, 반란,의거, 봉기, 항쟁' 등 논의가 분분하다. 어떻게 불러야 할지는 사실을 사실대로 볼때만이 가능할 것이다.

4.3의 전개과정

4.3이라는 숫자는 제주도 무장대가 단선, 단정의 반대와 조국의 자주통일, 극우세력의 탄압에 저항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미군정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을 향해 본격적으로 공격을 개시했던 1948년 4월 3일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날의 사건은 복합적이고 누적돼 전사(의한 기폭점에 불과하다. 이날이후 6년 6개월 이상 계속되 사건의 진행 또한 일관적이기보다는 그 성격과 양상을 가름하는 몇 고비 중요한 별화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43의 총체적인 모습을 살피기 위해서는 사건의 전개과정을 둘러 싸고 있는 시기적 특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4.3의 시기구분

4.3 이전

제 1 기 : 인민위원회 주도기(45.8.15-47.2.28)

일제하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했던 인물들의 중심으로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가 전도에 걸쳐 주도권을 장악한 시기이다. 승격(46.8)을 계기로 미군정의 우익강화 정책이 서서히 드러나고, 경찰기구 확대개편과 경비대 창설 등 물리력을 확보하지만 인민위원회산하 단체는 온건성을 띠면서 여전히 일정한 범위의 헤게모니를 장악한다.

제 2 기 : 미군정 공세기(47.3.1-48.4.2)

'3.1 발포사건'과 이어 벌어진 전도적인 총파업을 계기로 인민위원회와 미군정의 대립이 본격화된다. 육지부의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극우단체가 파견되면서 여러 차례 검거선풍이 일고, 특히 1947년 8월 대탄압과 1948년 3월 잇따라 발생된 3건의 고문치사 사건들은 민심을 크게 자극한다. 군정경찰은 이 기간에 2,500명을 구금한다. 미군정의 계속되는 탄압으로 도민들은 섬 밖으로 피신하거나 일부는 산에 올라 적극적인 무력항쟁을 준비한다.


4.3 이후

제 1 기 : 무장대 공세기(48.4.3-5.11)

4월 3일 첫 봉기를 시발로 무장대가 공세의 주도권을 쥔 시기이다. 미군정은 처음 이 사태를 '치안상황'으로 간주해 1,700명의 응원경찰대를 투입, 진압하려 했으나, 더욱 악화되자 경비대의 출동을 명령했다. '4.28협상'으로 한때 무장대와 경비대간에 평화적 해결방법이 모색되기도 했으나 경찰의 방해공작으로 무산된다. 5.10 선거를 전후한 무장대의 강력한 저지투쟁으로 도내 2개 선거구가 투표 미달, 전국에서 유일하게 선거 무효화된다.

제 2기 : 경비대 토벌기(48.5.12-10.19)

토벌의 주도권을 장악한 경비대의 작전의 전개된 반면 무장대의 공세는 비교적 약화된 시기이다. 미군정은 9연대장 교체와 함께 군경병력을 크게 증강시키고 브라운 대령을 현지에 파견, 최고 사령관으로서 토벌을 시도하나 무리한 강경작전으로 주민들을 오히려 도피 입산케 한다.

제 3 기 : 사태의 유혈기(48.10.20-12.31)

토벌대의 무제한적인 초토화 작전 전개로 인명피해가 극심한 시기이다. 경비대는 해안을 봉쇄한 후 해안선에서 5km이상의 중산간 지대를 '적성지역'으로 간주한다고 포고령을 내리고 주민소개령과 동시에 마을 방화와 무차별 학살을 자행한다. 특히 12월 연대교체를 앞둔 9연대는 '좋은 전과와 기록을 올리려는 욕망'에 의해 해안마을로 소개당한 주민들을 대거 학살한다. 토벌대에 쫓긴 무장대는 아지트를 산중 깊숙히 옮기는 한편 때때로 해안마을에 대해 보복기습전을 시도한다.

제 4 기 : 육. 해. 공 합동토벌기(49.1.1-3.1)

9연대와 교체된 2연대가 도착한 후 무장대의 공세가 한때 활기를 띠었으나 육. 해. 공 3군의 합동작전에 의한 토벌대는 또한 해안마을마다 성을 쌓게 해 무장대의 근거지를 차단하고 주민과 고립시키는 작전을 전개한다. 이 무렵 '북촌 주민 학살사건' 등 집단적인 주민 학살이 자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