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전주의 역사와 문화에서 발췌
왜망실에 대해서 궁금해서 찾다가 찾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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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주의 역사와 문화
- 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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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임진왜란과 전주성 수호
충무공 이순신은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也)”고 하였으며, 조선 중기의 사림(士林) 안방준은 “호남의 보존은 의병의 봉기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하였다. 이 말들은 임진왜란에서 호남의 중요성과 호남인의 활발했던 의병(義兵) 활동을 잘 대변하여 준다.
전라도 공략을 맡은 고바야카와 다카가게(小早川 隆景)는 그 별군 안고구치 에케이(安國寺 惠瓊)로 하여금 창원(昌原)에서 남원(南原)을 거쳐 전주를 공략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곽재우(郭再祐)가 이끄는 의병군에 의해 진로를 저지당하자 방향을 달리하였다. 그리하여 무주(茂朱)를 거쳐 금산(錦山)을 점령한 왜군은 두 길로 나뉘어 전주를 공략하려 하였다. 한 부대는 용담(龍潭)과 진안(鎭安)을 친 다음 웅치(熊峙)를 넘어 전주로 들어가려 했고, 한 부대는 진산을 친 후 이치(梨峙)를 거쳐 전주로 진격하려 하였다.
이에 김제군수 정담(鄭湛),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 함열출신 의병장 황박(黃璞) 등이 전주와 진안의 경계인 웅치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7월 7일 고바야카와 부대의 별군인 안고구치 부대가 웅치를 공략하였으며, 이를 맞아 결사적으로 항전하였다. 물러났던 왜군은 다음날 대군을 몰아 전면 공격을 개시하였다. 고개 아래의 제1선 황박의 부대에 이어 중턱의 제2선 이복남의 진지가 무너졌으며, 고개 맨 위의 제3선 정담의 진지까지 밀린 조선군은 결국 안덕원(安德院)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후퇴를 마다하고 결사항전했던 김제군수 정담과 그의 종사관 이봉(李葑), 비장 강운(姜運)과 박형길(朴亨吉), 고부출신 의병장 김제민(金齊閔)의 아들 김안(金晏) 등이 순절하였으며, 해남현감 변응정(邊應井)이 중상을 입는 등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왜군은 이들의 의로운 죽음에 감복하여, 조선인의 시체를 모두 모아 노변에 큰 무덤을 만들어 장사지내고, 그 위에 조선국의 충의로운 용사들에게 조의를 표한다(弔朝鮮國 忠肝義膽 )라고 쓴 표목을 세워 주었다.
웅치싸움에서 비록 패배하였지만, 이틀간에 걸친 혈전으로 왜군의 전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혀 전라도를 보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이 전투의 의의는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한편 웅치에서 후퇴했던 이복남은 안덕원에 진을 쳤으며, 웅치전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동복현감 황진(黃進, 전라도 고부출신)도 안덕원 뒷산에 진을 치고 왜군을 무찔렀다. 웅치를 가까스로 돌파한 왜군은 안덕원에서 이복남과 황진의 반격을 받아 전력에 또 한차례 손실을 입었다. 그럼에도 안코쿠지의 군대는 7월 10일 전주성 동문 밖까지 이르러 성황산(지금의 기린봉?)으로도 올라가 전주성을 넘보았다. 현재 아중 저수지 너머에 왜막실(왜망실)로 불리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은 웅치를 넘어온 왜군과들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전라감사 이광(李洸)은 남고산성에 진을 치고 있다가 왜군이 동문밖까지 이르렀다는 소리를 듣고 금구로 도망하였으며, 의병장 이정란(李廷鸞)이 군사를 모아, 위장전술을 구사하는 등의 전략으로 전주성을 지켰다. 이정란은 의병을 성밖에 만들어 놓고, 낮에는 깃발을 많이 세워놓고, 밤에는 온 산에 횃불을 올리게 하면서 기병으로 출몰하여 전주부성 내에 병력이 많이 있는 것처럼 꾸며 왜군을 속였다. 그러자 왜군은 성밑에 와서 살피다가 공격하지 못하고 달아나 버렸다.
이치는 진산(珍山)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전주 동북쪽 대둔산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왜군의 전라도 침공을 대비해, 도절제사 권율(權慄)은 1천 5백여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이치에 진을 쳤으며, 안덕원에서 왜군을 공략하고 이치에 도착한 황진은 최전방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 싸움에서 황진은 그 휘하의 공시억 위대기 및 의병장 황박과 함께 제일선에서 고바야카와 부대를 맞아 대접전을 벌였다. 진두지휘하던 황진이 적의 조총에 맞아 중상을 입자 사기가 오른 왜군은 대공세를 펼쳤으나 공사억 등이 필사적으로 이를 방어하였다. 이치전투는 왜군 측에서 임진왜란 3대전의 하나로 꼽았을 만큼 치열한 혈전이었다. 이 싸움에서 조선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왜군은 시체가 수리에 걸쳐 널려 있을 정도로 많은 사상자를 내고, 전의를 상실한 채 금산으로 후퇴하였다.
이렇게 웅치와 이치싸움으로 전라도로 들어오는 길목을 지키고, 전주성을 수호함으로써 조선 제일의 곡창지대 호남이 보존될 수 있었으며, 이렇게 됨으로써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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