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시간의 블로그...

환멸을 넘어서 (시사저널 고종석 칼럼)

환멸을 넘어서

[시론]

16대 대통령 선거가 막 치러진 뒤 한 잡지에 쓴 글에서, 나는 노무현씨의 정치적 업적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고, 그것은 그의 임기가 끝나는 시점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반 년쯤 지나서 나는 한 칼럼니스트가 그 말을 노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맥락에서 인용한 것을 보고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는데, 사실 내가 그 말을 한 것은 노무현이라는 개인에 대한 지극한 편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나의 그 말은 소수파적 약점을 수두룩하게 지니고도 굽힘 없는 신념과 윤리적 다부짐으로 국가 수반의 자리에까지 오른 정치인에 대한 경의였고, 그의 대통령 당선이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에게 줄 희망과 자부심에 대한 예찬이었으며, 혹시라도 그에게 환상을 품고 있다가 실망해버릴지도 모를 지지자들의 기대 지평을 미리 낮추어놓기 위한 예방 주사였다. 나라고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내심의 기대가 왜 없었겠는가?

노대통령의 임기가 반이 지난 지금, 나는 두 해 반 전의 내 말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하며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그 씁쓸함은 그 말이 부정적 맥락에서 인용된 의미로만 옳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실망하지 않기 위해 기대를 한껏 낮추고 있던 내 눈에도, 그가 대통령 당선을 넘어서는 업적을 남기기는 이제 어려워 보인다.

한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가장 좋게 해석하자면, 노대통령이 ‘모든’ 국민으로부터 ‘우리들의 대통령’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북 송금 특검법 수용에서부터 이라크 파병과 민주당 분당을 거쳐 재벌 감싸기와 최근의 대연정 제의에 이르기까지 그의 임기 전반은 지지자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며 정치적 반대파의 환심을 사는 데 통째로 바쳐졌다.

그러나 이런 영합은 별 효과가 없었다. 지금 그는 그런 정도의 비위 맞추기에는 꿈쩍도 않은 채 그를 여전히 ‘우리들의 대통령’으로는 여기지 않는 기득권층과, 그의 우향 돌진에 실망해 배신감을 곱씹고 있는 기존 지지층으로부터 동시에 고립되어 있다. 이제 그가 기댈 곳은 일본 우익이 얼떨결에 거들어주고 있는 한국인들의 민족주의적 열망이나, 야당 대변인의 거친 입에 대한 유권자들의 혐오감 정도밖에 없다.

‘대통령 당선’이 유일한 업적인 대통령 될 것인가

노대통령이 지금까지의 방식으로 남은 임기를 채울 때, 그가 남길 유산은 정치적으로만이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파멸적일 것이다. 그의 실패는 사회적 문화적 소수자에 대한 유권자들의 편견을 정당화하고 강화함으로써, 앞으로는 결코 그와 같은 배경의 인물이 정치의 중심에 서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게다가 노대통령은 청와대에 입주하기까지의 정치 역정 동안 지극히 윤리적인 이미지를 지녔던 사람이다. 대통령 선거운동 때부터 지금까지 노대통령의 복심(腹心) 노릇을 하고 있는 유시민 의원이 출사표를 던지며 발설한 ‘단심(丹心)’이라는 말은, 유시민만이 아니라 그대로 노무현의 이미지이기도 했다.

누구도 그 진실성을 의심할 수 없는 표정으로 단심을 되뇜으로써, 그러나 결국 그 단심이 덧없는 단심이고 어쩌면 계산된 단심이라는 것을 너무 빨리 드러내버림으로써, 노대통령은 그렇지 않아도 얄팍한 우리 사회의 윤리적 감수성에 치명타를 가했다. 그가 처음부터 현실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만으로 이것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그를 지지한 사람들 다수는 그의 윤리성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대통령 당선마저 업적이 아니라 해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2002년 12월에 한국의 개혁적 유권자들에게 노무현말고 다른 대안이 없었던 것도 엄연하다. 이와 비슷한 난처함은 2007년 12월에도 되풀이될 것이다. 그리고 노대통령의 우향 돌진과 갈팡질팡은 그의 무능이나 변덕보다는 우리 사회에 미만한 사회적·정치적 상상력의 질과 더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푸념이 아니더라도, 그는 국제 자본과 연결된 기득권 세력의 사나운 욕망의 파도에 휘둘리는 일엽편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개혁 정부’가 세상을 바꾼다는 환상을 깨끗이 버리고, 우리들 일상의 발걸음을 왼쪽으로, 좀더 왼쪽으로 옮기는 데 진력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