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시간의 블로그...

멈춰 서서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W. H. DAVIS

근심으로 가득 차
멈춰 서서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인생이랴.

나뭇가지 아래 멈춰 서서 양이나 젖소처럼
물끄러미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숲을 지나다가 다람쥐가 풀밭에
도토리 숨기는 것을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한낮에도 밤하늘처럼 별들로 가득 찬
시냇물을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미인의 눈길에 돌아서서 춤추듯 움직이는
발걸음을 지켜볼 시간이 없다면

눈에서 시작된 미소가
입가로 번질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다면

근심으로 가득차
멈춰 서서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불쌍한 인생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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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좋은 봄날 불무님의 섬진강 소풍 삐끼 글에서.. ^^

여유... 마음... 세월과 인생...

좋구나.

연극이 끝난 후... 란 노래도 생각나고...

크리스마스 전야 미사 후.. 란 노래도 생각난다.

17대 4.15 선거가 어제 끝이 났다.

아무런 정책적 대립도 없이, 아무런 이슈도 없이, 아무런 혼돈도 없는 한국정치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낮춘 선거 였다고 보인다.

물론, 고고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역사의 관성이 뒤로 밀리지는 않았을 뿐이다.

이번 선거를 통해 한국 정치사에는 새로운 정치 형태가 나타났다. 물론 과거에는 비지론(비판적 지지)의 형태로 나타났지만, 이번처럼 그렇게 저열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 이름도 추한... "앵벌이 정치", "땡깡 정치"...

물론 앵벌이도 필요하고 땡깡도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멀쩡한 집안의 쪽빡을 깨더니...

남아 있는 집안의 쪽박도 깨지 못해 날뛰던 애들이... 그 쪽박도 마저 깨고, 들고 나간 쪽박도 깨지니... 쪽빡 깨진게 동냥해주는 사람 탓인양 또 앵벌이를 했던 것이다.

개혁이니 뭐니 해서 뛰쳐나간 앵벌당...

(사실은 자신들의 밥그릇이 귀해서 나간 사람들..., 정치적 능력이 없어서 뛰쳐 나간 사람들...)

그들이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는 미지수다.(사실 눈에 선하다 ㅡㅡ;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굴을 싹 바꾸겠지... 물론 근태 정도가 앞으로 나선다면 봐줄수 있을지 모른다. 그 외에는 수준 미달이다.)

이제... 새로운 정치 세력이 형성되었다. 열우당의 정치적 근간은 통추요, 그 인적 구성은 시민단체다.

과거 힘들게 어렵게 재야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시대는 가고, 지역차별에 대한 양비론의 열우당이 새시대랍시고 문을 연단다. 시민 단체들은 그 댓가를 치룰 것이다. better or worse로...

두고 보겠다.

그들이 힘이 없어서 책임이 없다던 "파병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그들이 목놓아 외치던 "주민소환제"를 법 없이도 이루어낸 "부안"에 대한 엽기적인 태도들이 어떻게 바뀔지...

내 맘속에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 "미순이 효순이"와 "광주"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어떨지...

"신밧드의 나라" 이라크에 드리워지는 폭탄의 흔적들을 이 나라 언론들과 함께 어떻게 말해갈지...

진보적인 담론보다는 당리당략에 따랐던 (말 그대로 힘이 없었기 때문에? 라고 했던 ) 그 정치개혁을 어떻게 이뤄갈지...

"균형 재정"을 이루겠다고 사람들 모가지 쳐대던 신용불량 양산 정책이 어떻게 바뀔지...

미국을 위해서라면 북한에게 "제재조치"를 맘껏 취할수 있던 그 외교 정책이 어떻게 바뀔지...

미국의 말씀이라면 MD도 넙쭉 받아오는 정책이 얼마나 바뀔지...

너희의 앵벌이 짓과 올인 정치에... 국민들은너희 여당 시켜줬다.

두고 보겠다.

+_+ Dark Avenger... +_+

-꼬리- 니들 "이제 겨우몇달 밖에 안됐다~"는 말은 입밖에도 내지마라.

사람 살아가는게 내일로 미뤄 진다더냐. 그것은 너희의 준비 없음을 보여주는 말뿐이다.

본인의 자료가 아니므로 스크랩이 필요한 경우 원저작자의 홈피를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http://www.nfc.co.kr/about/Present_Times/Present_Times&01/Present_Times&01a/


4·3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여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
폭동이라고 불리우는 4·3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1948년 4월 3일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여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 바로 제주 4.3사건이다. 미군정 초기부터 지속되어온 인민위원회 및 대중들과 경찰, 우익단체간의 갈등이 무장봉기로 폭발하였다.
한라산을 근거로 하는 유격전으로 발전, 49년까지 계속되어 이에 대한 진압작전에 나선 토벌대는 초토화작전을 전개, 유격대와 주민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공격, 집단 학살하여 수많은 인명이 학살당했다.
한사람의 죽음도 그렇게 극진하게 장래를 치루는 법인데, 난리를 겪으면서 염조차 못하고 매장된 경우가 부지기수일진데 50년 가까이 구천을 맴도는 원귀들을 달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역사를 정립하고 국민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데 정치적인 계산이 있어서는 안된다. 오직 실체적 진실의 발견과 명예회복으로 화합차원의 대책마련에 모두 예지를 모아야 하며 어느 쪽에 위치하였던지간에 악몽과도 같았던 마음으로 전환하여 아픈 역사의 앙금을 하루 빨리 걸어낼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용어문제

제주도 폭동사건 : 1948년 4월 3일 남노당의 사주아래 제주도 한라산에서 공산무장폭도가 봉기한 사건(국사대사전, 교각 도서출판)
제주 4.3사건 : 1948 4월 3일을 기해서 제주도 전역에 걸쳐 남조선노동당 계열의 좌익분자들이 일으킨 대폭동(한국민족문화대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제주 4.3은 위와 같이 용어조차 정립되지 못한 채 '난리, 사태, 소요, 폭동, 반란,의거, 봉기, 항쟁' 등 논의가 분분하다. 어떻게 불러야 할지는 사실을 사실대로 볼때만이 가능할 것이다.

4.3의 전개과정

4.3이라는 숫자는 제주도 무장대가 단선, 단정의 반대와 조국의 자주통일, 극우세력의 탄압에 저항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미군정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을 향해 본격적으로 공격을 개시했던 1948년 4월 3일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날의 사건은 복합적이고 누적돼 전사(의한 기폭점에 불과하다. 이날이후 6년 6개월 이상 계속되 사건의 진행 또한 일관적이기보다는 그 성격과 양상을 가름하는 몇 고비 중요한 별화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43의 총체적인 모습을 살피기 위해서는 사건의 전개과정을 둘러 싸고 있는 시기적 특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4.3의 시기구분

4.3 이전

제 1 기 : 인민위원회 주도기(45.8.15-47.2.28)

일제하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했던 인물들의 중심으로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가 전도에 걸쳐 주도권을 장악한 시기이다. 승격(46.8)을 계기로 미군정의 우익강화 정책이 서서히 드러나고, 경찰기구 확대개편과 경비대 창설 등 물리력을 확보하지만 인민위원회산하 단체는 온건성을 띠면서 여전히 일정한 범위의 헤게모니를 장악한다.

제 2 기 : 미군정 공세기(47.3.1-48.4.2)

'3.1 발포사건'과 이어 벌어진 전도적인 총파업을 계기로 인민위원회와 미군정의 대립이 본격화된다. 육지부의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극우단체가 파견되면서 여러 차례 검거선풍이 일고, 특히 1947년 8월 대탄압과 1948년 3월 잇따라 발생된 3건의 고문치사 사건들은 민심을 크게 자극한다. 군정경찰은 이 기간에 2,500명을 구금한다. 미군정의 계속되는 탄압으로 도민들은 섬 밖으로 피신하거나 일부는 산에 올라 적극적인 무력항쟁을 준비한다.


4.3 이후

제 1 기 : 무장대 공세기(48.4.3-5.11)

4월 3일 첫 봉기를 시발로 무장대가 공세의 주도권을 쥔 시기이다. 미군정은 처음 이 사태를 '치안상황'으로 간주해 1,700명의 응원경찰대를 투입, 진압하려 했으나, 더욱 악화되자 경비대의 출동을 명령했다. '4.28협상'으로 한때 무장대와 경비대간에 평화적 해결방법이 모색되기도 했으나 경찰의 방해공작으로 무산된다. 5.10 선거를 전후한 무장대의 강력한 저지투쟁으로 도내 2개 선거구가 투표 미달, 전국에서 유일하게 선거 무효화된다.

제 2기 : 경비대 토벌기(48.5.12-10.19)

토벌의 주도권을 장악한 경비대의 작전의 전개된 반면 무장대의 공세는 비교적 약화된 시기이다. 미군정은 9연대장 교체와 함께 군경병력을 크게 증강시키고 브라운 대령을 현지에 파견, 최고 사령관으로서 토벌을 시도하나 무리한 강경작전으로 주민들을 오히려 도피 입산케 한다.

제 3 기 : 사태의 유혈기(48.10.20-12.31)

토벌대의 무제한적인 초토화 작전 전개로 인명피해가 극심한 시기이다. 경비대는 해안을 봉쇄한 후 해안선에서 5km이상의 중산간 지대를 '적성지역'으로 간주한다고 포고령을 내리고 주민소개령과 동시에 마을 방화와 무차별 학살을 자행한다. 특히 12월 연대교체를 앞둔 9연대는 '좋은 전과와 기록을 올리려는 욕망'에 의해 해안마을로 소개당한 주민들을 대거 학살한다. 토벌대에 쫓긴 무장대는 아지트를 산중 깊숙히 옮기는 한편 때때로 해안마을에 대해 보복기습전을 시도한다.

제 4 기 : 육. 해. 공 합동토벌기(49.1.1-3.1)

9연대와 교체된 2연대가 도착한 후 무장대의 공세가 한때 활기를 띠었으나 육. 해. 공 3군의 합동작전에 의한 토벌대는 또한 해안마을마다 성을 쌓게 해 무장대의 근거지를 차단하고 주민과 고립시키는 작전을 전개한다. 이 무렵 '북촌 주민 학살사건' 등 집단적인 주민 학살이 자행된다.

환멸을 넘어서 (시사저널 고종석 칼럼)

환멸을 넘어서

[시론]

16대 대통령 선거가 막 치러진 뒤 한 잡지에 쓴 글에서, 나는 노무현씨의 정치적 업적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고, 그것은 그의 임기가 끝나는 시점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반 년쯤 지나서 나는 한 칼럼니스트가 그 말을 노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맥락에서 인용한 것을 보고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는데, 사실 내가 그 말을 한 것은 노무현이라는 개인에 대한 지극한 편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나의 그 말은 소수파적 약점을 수두룩하게 지니고도 굽힘 없는 신념과 윤리적 다부짐으로 국가 수반의 자리에까지 오른 정치인에 대한 경의였고, 그의 대통령 당선이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에게 줄 희망과 자부심에 대한 예찬이었으며, 혹시라도 그에게 환상을 품고 있다가 실망해버릴지도 모를 지지자들의 기대 지평을 미리 낮추어놓기 위한 예방 주사였다. 나라고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내심의 기대가 왜 없었겠는가?

노대통령의 임기가 반이 지난 지금, 나는 두 해 반 전의 내 말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하며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그 씁쓸함은 그 말이 부정적 맥락에서 인용된 의미로만 옳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실망하지 않기 위해 기대를 한껏 낮추고 있던 내 눈에도, 그가 대통령 당선을 넘어서는 업적을 남기기는 이제 어려워 보인다.

한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가장 좋게 해석하자면, 노대통령이 ‘모든’ 국민으로부터 ‘우리들의 대통령’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북 송금 특검법 수용에서부터 이라크 파병과 민주당 분당을 거쳐 재벌 감싸기와 최근의 대연정 제의에 이르기까지 그의 임기 전반은 지지자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며 정치적 반대파의 환심을 사는 데 통째로 바쳐졌다.

그러나 이런 영합은 별 효과가 없었다. 지금 그는 그런 정도의 비위 맞추기에는 꿈쩍도 않은 채 그를 여전히 ‘우리들의 대통령’으로는 여기지 않는 기득권층과, 그의 우향 돌진에 실망해 배신감을 곱씹고 있는 기존 지지층으로부터 동시에 고립되어 있다. 이제 그가 기댈 곳은 일본 우익이 얼떨결에 거들어주고 있는 한국인들의 민족주의적 열망이나, 야당 대변인의 거친 입에 대한 유권자들의 혐오감 정도밖에 없다.

‘대통령 당선’이 유일한 업적인 대통령 될 것인가

노대통령이 지금까지의 방식으로 남은 임기를 채울 때, 그가 남길 유산은 정치적으로만이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파멸적일 것이다. 그의 실패는 사회적 문화적 소수자에 대한 유권자들의 편견을 정당화하고 강화함으로써, 앞으로는 결코 그와 같은 배경의 인물이 정치의 중심에 서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게다가 노대통령은 청와대에 입주하기까지의 정치 역정 동안 지극히 윤리적인 이미지를 지녔던 사람이다. 대통령 선거운동 때부터 지금까지 노대통령의 복심(腹心) 노릇을 하고 있는 유시민 의원이 출사표를 던지며 발설한 ‘단심(丹心)’이라는 말은, 유시민만이 아니라 그대로 노무현의 이미지이기도 했다.

누구도 그 진실성을 의심할 수 없는 표정으로 단심을 되뇜으로써, 그러나 결국 그 단심이 덧없는 단심이고 어쩌면 계산된 단심이라는 것을 너무 빨리 드러내버림으로써, 노대통령은 그렇지 않아도 얄팍한 우리 사회의 윤리적 감수성에 치명타를 가했다. 그가 처음부터 현실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만으로 이것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그를 지지한 사람들 다수는 그의 윤리성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대통령 당선마저 업적이 아니라 해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2002년 12월에 한국의 개혁적 유권자들에게 노무현말고 다른 대안이 없었던 것도 엄연하다. 이와 비슷한 난처함은 2007년 12월에도 되풀이될 것이다. 그리고 노대통령의 우향 돌진과 갈팡질팡은 그의 무능이나 변덕보다는 우리 사회에 미만한 사회적·정치적 상상력의 질과 더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푸념이 아니더라도, 그는 국제 자본과 연결된 기득권 세력의 사나운 욕망의 파도에 휘둘리는 일엽편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개혁 정부’가 세상을 바꾼다는 환상을 깨끗이 버리고, 우리들 일상의 발걸음을 왼쪽으로, 좀더 왼쪽으로 옮기는 데 진력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