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는 아마도... 이너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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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의 전개과정 등
19일 저녁에는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까지 합세, 시위가 기층민으로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20일을 기해 위수령을 선포하고 무력 진압한 결과 이틀간의 마산시위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부마항쟁의 불씨는 10·26사태를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1979년 10·26사태이후 서울의 봄은 신군부의 유신연장 음모에 의해 안개정국 속에서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 1980년 3월 신학기부터 각 대학에 학생회와 평교수회가 부활되고 긴급조치로 밀려났던 해직교수와 제적학생들이 학교에 복귀함으로써 학원민주화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노동자들도 노조 민주화, 근로조건 개선을 내세우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27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힘의 응집을 위하여 집회와 가두시위를 일제히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5월 14일 광화문, 종로 등에 5만여명, 15일에는 서울역 광장에 학생, 시민 20만명이 운집하여 계엄철폐, 민주화 추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학생지도부는 국민의 의사가 충분히 전달된 것으로 판단하고 17일부터 정상수업을 받으면서 시국을 관망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계엄사령부는 학생시위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틈을 타서 5·17비상계엄확대조치를 선포함에 따라 그 동안 용솟음쳤던 민주화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1980년 4월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학생들의 민주화투쟁과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진압하고 정권장악을 목적으로 일부 정치군인들이
최초 충돌, 전남대 정문 앞
5·17비상계엄 전국확대로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 정문 앞에서 5월 18일 10시경 등교 중이던 전남대생들과 출입을 제지하는 계엄군사이에서 최초 광주항쟁의 단초가 제공되었다. 무장 계엄군의 통제에 항의하는 학생 수는 삽시간에 100여명으로 불어났고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엄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등교를 원하는 당연한 권리였고 평화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시위였다.
교문 안에 있던 공수부대는 메가폰을 통해 두어 차례 해산을 종용한 후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학생들을 향해 돌진해 왔다. 5·18민중항쟁의 최초 충돌이자 과잉진압의 시작이었다. 공수부대는 달아나는 학생들을 잡기 위해 인근 주택을 뒤지기도 하고 이를 저지하는 시민들까지 구타하였다. 이런 공수부대의 포악한 진압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벌였고 이것이 5·18광주민중항쟁으로 전개되었다.
시민의 분노와 저항, 금남로
5월 18일 오전 전남대 정문 앞에서 벌어졌던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학생들이 시내에서 가두시위를 하자 계엄군은
계엄군의 진압작전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진상을 알기 위해 금남로로 몰려들었다. 19일 오전 2∼3천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군경의 저지선과 대치하게 되었다. 군경과 시민의 충돌이 시작한 지 30분 정도 지나서 11공수여단 천여명이 트럭 30여대로 도청 앞과 금남로에 진출하여 작전명 "화려한 휴가"라는 말 그대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하였고 3∼4명이 한조가 되어 시위현장의 주변 건물까지 샅샅이 뒤지며 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만행을 목격하고 전해들은 광주시민들은 맨주먹 또는 몽둥이, 각목을 들고 나와 결사 항전하였다.
항쟁의 확대와 첫 발포
5월 20일 항쟁 3일째, 오전에는 소강상태였으나 오후가 되면서 광주 시가지는 다시 팽팽한 대치국면으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시장의 상인들까지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기 시작하여 그 인파는 10만여명이 넘었다.
신군부의 잔학한 만행
공수부대에 의해 최초로 희생된
계엄군의 퇴각과 양민학살
5월 21일은 석가탄신일로 공휴일이었다. 광주시민들은 어제의 참상을 뒤돌아보고 계엄군의 만행에 항의하기 위해 아침부터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무장시민군의 등장
5월 21일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총격에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자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느꼈다. 일부 시위대는 화순, 나주, 해남, 영암 등 시외지역으로 진출해 광주의 참상을 알렸다. 전남의 여러 지역에서 응원 시위부대가 왔다. 광주시위의 진압에 동원되어 텅 빈 지서, 경찰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M1소총, 카빈소총, 기관총과 탄약, 화순광업소의 TNT까지도 날라져왔다. 이들 무기들이 시민에게 지급되면서 이른바 '시민군'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제 싸움은 시민군과 계엄군의 총격전으로 전개되었다. 최신식 무기의 정예부대와 비조직적이고 낡은 무기로 무장한 시민군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광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혈전을 벌였다. 5월 21일 도청 앞에서 전개된 시민군과 계엄군과의 시가전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민군은 자발적인 지도부가 형성되어 무기조작법과 무기관리 등 무기소지자의 통제가 실시되었고 일반차량을 통제하는 등 시민군의 활약은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다.
항쟁 5일째 되는 22일,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고 어지러운 거리를 자발적으로 청소하는 등 질서를 회복해가기 시작했다. 시장과 상점들도 문을 열고 전기, 수도 등은 관련 공무원의 지원으로 해결되었다. 많은 부상자들 때문에 혈액이 부족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헌혈자가 잇따랐고 황금동 아가씨들까지 자청하여 제공했다. 치안력이 없는 상황에서도 은행 같은 금융기관에 대한 사고는 한 건도 없었고 금은방 등 일반 상점에도 별다른 사고가 없었다. 시민군과 항쟁지도부의 식사도 시민들의 자발적인 도움으로 해결되었다. 시민군 지도부에서는 차량통행증, 유류발급증, 상황실출입증 등을 발부하는 한편 외곽지대 자체방위를 맡은 시민군과 유대를 갖고 지원하기 위해 기동타격대를 편성, 출동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시민들의 높은 시민정신과 도덕성, 자치능력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5월 22일 거센 시민의 항쟁에 밀려 계엄군이 일시 퇴각했지만 이미 저질러진 엄청난 사태 앞에서 쌍방 모두 슬기로운 수습이 요망되었다.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5·18수습대책위원회』였다. 이 조직은 명망가이자 민주인사로 알려진 신부, 목사, 변호사, 교수 등 20여명으로 구성되었고 선봉에 선 학생들 중심의『학생수습대책위원회』와 종래의 명망가 중심의『일반수습대책위원회』도 출범하였다. 민주인사나 유지급 중심으로 구성된 수습위에서는 주로 계엄당국과의 대화나 건의, 협의 등을 맡았고 학생중심의 수습위에선 대민 업무를 맡아보았다. 그들은 장례반, 홍보반, 차량통제반, 무기수거반, 의료반 등으로 나누어 활동하였다. 또한 계엄사에 요구한 7개항의 요구조건을 홍보하고 300여정의 무기를 회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엄사의 무성의와 그들의 각본 때문에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무기회수문제도 수습대책위원회의 의견 불일치로 결국 무기반납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는 새로운 항쟁지도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5월 18일에 발발한 민중항쟁의 소식은 언론보도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전남일원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18일 오후와 19일에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행해진 무자비한 계엄군의 살상행위는 시외버스 승객들에 의해 퍼져나갔다. 또 시위대중 일부가 아시아 자동차공장의 차고에서 차량을 대거 획득 운행하면서 도내 각 지역에 직접 알리고 응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광주의 항쟁은 전남일원의 호응 속에 각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5월 21일의 집단발포 소식은 전남도민의 의분을 사기에 충분했고 이에 화순 나주 영암 강진 무안 해남 목포 등 전남 일원으로 확산되었다. 시위대는 전남뿐만 아니라 전북 등 전국적인 진출을 시도했으나 고속도로와 철도를 철저히 봉쇄한 계엄군에 의해 좌절되었다. 광주는 목마르게 응원군을 기다렸지만 전남 이외의 지역과는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다.
시민군의 결사항쟁
5월 26일 새벽 계엄군이 탱크 등 중화기를 앞세우고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하자 수습대책위원들은 일명 '죽음의 행진'을 감행하여 무력진압을 저지 만류하였다. 이것은 계엄군의 무력 진압작전의 예고였다.
신군부의 무력진압
수습위의 건의사항도 묵살되고 대화도 평화적인 해결도 거부당한 채폭동을 일으킨 총기소지의 폭도로 지목된 시민군들은 죽거나 부상당하였고 생존자는 모두 체포되어 군부대로 끌려갔던 5월 27일 새벽, 공수부대원들은 시체더미 위에서 승리가를 합창하며 충정작전을 끝냈다. 도청탈환을 목표로 조직된 특공대는 27일
5·18민중항쟁의 부활
마침내 6월항쟁으로 이어져 신군부 세력들은 6·29선언으로 항복했고 1988년 5공 청산을 위한 '5공비리특위'와 '광주청문회'가 열렸으며 '역사바로세우기' '전노일당 사법처리'가 이루어져 광주항쟁은 명명백백하게 정의로운 민주화운동의 의거로 부활, 승리하였다.
연행 구금과정과 잔학상
5·17비상계엄령 전국 확대실시와 함께 이루어진 예비검속으로부터 항쟁기간과 그 이후에 연행된 사람에 이르기까지 광주항쟁과 관련하여 연행, 구속된 사람의 숫자는 수천을 헤아린다. 광주의 전지역을 쑥밭으로 만들고 초토화시킨 토벌작전 그대로였다. 항쟁기간 중 난데없이 들이닥친 계엄군은 집, 사무실, 학원, 도서관, 식당, 시위주변의 길거리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민들을 총 개머리판과 곤봉 등으로 구타하여 트럭에 실어 교도소나 상무대로 연행하였다. 심지어 팬티바람으로 줄줄이 묶어 폭도취급을 하였다. 전남대나 광주역 부근에서 붙잡힌 사람들은 전남대 본관과 이학부 건물에 수용했다가 21일 3공수여단이 교도소로 철수할 때 함께 이송되었다. 또한 상무대로 끌려간 사람들은 상무대 안의 교회와 연병장의 임시막사에 수용되었다. 굶주림과 구타, 비좁은 공간에 몇 백명씩 공동 수감되는 등 지옥을 방불케 하는 그날의 참상을 두고 사람들은 "나는 그때 인간이 아니었다"고 회상한다.
죽음과 삶의 갈림길
상무대로 붙잡혀온 많은 사람들은 상무대 영창으로 넘겨지기 전 보안대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며 짜여진 각본에 맞춰 내란음모 선동 등의 죄명으로 수사를 받았다. 특히 신군부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상 연관이 없는
고문이나 구타를 당한 사람들은 석방이 된 후에도 오랜 시일동안 후유증에 시달려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고 정신질환을 앓다가 사망하는 등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들은 풀려난 후에도 엄청난 공포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숨죽이며 살아왔다.
이 사건은 5·18민중항쟁의 진실을 왜곡하고 은폐하기 위해 신군부 세력이 조작한 사건이었다. 공수부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간 5월 21일 저녁, 신군부 세력은 TV를 통해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발표하였다. 당시 신군부 세력은 "광주사태는 간첩
상무대의 법정은 5·18민중항쟁에 참여했던 구속자들을 재판하기 위해 급조하여 지어졌다. 당시 군부는 5·18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법정에 총으로 무장한 헌병을 입장시켜 놓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가운데 비공개로 421명의 구속자들을 약식재판으로 진행하였다.
각본에 의한 수사, 각본에 의한 형식적 군사재판이었다. 구속자들은 재판시작 전에 민간인 신분으로 합당한 절차가 무시된 군사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항의하였으며 항의표시로 소리 높여 애국가를 불렀다. 또한 구속자들은 재판과정에서 일부 정치군인들의 권력찬탈을 위한 양민학살 만행을 폭로하며 언젠가는 5·18의 진상이 밝혀져 반드시 정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굳은 신념으로 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판부는 짜여진 각본에 의해 모두에게 사형, 무기징역 등 실형을 선고하였다.
5·18민중항쟁이 신군부에 의해 무력 진압된 후 전국민은 암울한 침묵의 시대를 보내야만 했다. 5·18학살책임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주문제를 언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구속자 가족들의 피눈물나는 구명운동과 함께 부모자식을 잃어버린 유족들, 부상자들만이 신군부 정권에 맞서 진상규명을 요구하였다.
학생들은 5·18진상규명을 요구하면서 광주항쟁의 진압 배후로 미국을 지목하고 미문화원 등을 방화하거나 점거농성을 벌이는 등 반미운동을 전개하였다.또한 일부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민주화를 위해 분신투쟁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투쟁은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져 신군부의 폭압정치는 심각한 위기를 맞았고 결국 '6·29선언'으로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게 되었다. 6월항쟁 이전까지는 5·18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위령제조차 경찰의 방해로 치를 수 없었고 일반 국민들의 5·18묘지 참배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5·18특별법 쟁취와 5·18의 진실
1988년 여소야대라는 정국 속에서 국회 광주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광주청문회가 실시되면서 그 동안 왜곡 은폐되었던 5·18민중항쟁의 진실이 전국에 보도됨으로써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정부도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함에 따라 추모제 등 5월 행사가 합법적으로 거행되었다. 1992년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5·18학살책임자 처벌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역사에 의한 처벌을 강조함에 따라 학생, 지식인들의 철야농성과 항의성명이 빗발쳤고 학살책임자 고소고발운동이 본격화되었다.문민정부는 잘못된 과거 청산과 사회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전국민적 요구에 밀려 1995년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신군부 세력에게 역사와 법과 정의에 의한 준엄한 심판을 받게 하였다. 또한 1997년에는 5월 18일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면서 5·18민중항쟁에 대한 제도적 복권이 이루어졌다.
법정 영창의 복원
5·17비상계엄령으로 민주화를 촉구하는 정당한 시위를 폭동으로 몰아 무력 진압한 후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1984년 3월 상무대 이전을 지시함에 따라 부지매각과 군 시설물의 외곽 이전이 추진되었다. 상무대 지역을 신도심으로 개발하면서 도로 및 아파트 건설로 인해 5·18민중항쟁의 역사 현장인 법정 영창이 방치되자 5월 단체에서 법정 영창의 현장보존과 유지대책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주변지역 성토로 인해 건물구조의 안전성 및 현장 보존의 어려움이 대두됨에 따라 차선책으로 인근에 공원을 조성, 당시의 모습을 재현키로 결정하였다.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재사용이 가능한 자재들을 활용하여 1999년 4월 현재의 장소에 복원하였다.
군사정권이라는 무거운 탄압 속에 오랫동안 숨죽이고 살았던 한국의 풀뿌리들은 1980년 광주를 통해 어느 한 계층에서만 외쳐왔던 민주 자주 인권 통일이라는 기치를 그들 가슴 내부에 자연스레 구호로 형성시켰으며 '민주주의'나 '인권사상'이 '민중'이라는 계층에 비로소 합류할 수 있는 시민 민주주의를 획득하게 되었다.
학교 교과서를 통해 몇십년 걸려도 깨닫지 못한 진정한 인권에 눈을 뜨게 됐으며, 부당한 권력에는 저항권이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리를 깨달았고 민주주의는 남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키고 창조한다는 진리를 알게 되었다. 지난 어두운 시절을 뒤로하고 이제 광주는 항쟁의 대명사로서만 아니라 한반도를 포함한 제3세계의 민중, 인권운동에 강력한 변혁의지를 심어주었다. 5·18광주민중항쟁은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저항으로 출발, 자치공동체의 형성 및 정의를 위한 자기희생과 반인륜적 학살에 저항하는 세계적 인권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책임자가 권력을 장악한 참혹한 상황에서도 '5·18 진상규명운동'과정에서 범국민적 저항으로 승화된 움직임은 세계 곳곳에 제2의 광주 공동체정신을 탄생시켰다. 5·18민중항쟁의 진상규명, 학살책임자 처벌, 명예회복, 기념사업, 배상이라는 5대 원칙이 필리핀의 민중혁명과 태국, 인도네시아의 민주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대만의 계엄령 해제 및 민주화 추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중국과 베트남의 개혁을 촉진시키는 요인으로도 작용하였고 동구의 민주화에도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광주항쟁이 기폭제가 된 한국의 민주화는 제3세계 민 5·18민중항쟁이 돋보였던 것은 항쟁 당사자들이 폭도로 몰리고 구속되는 암울했던 시절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반 독재투쟁에 나섰으며, 마침내 제3세계의 진정한 민주화를 출발시켰다는 점이다.
항쟁의 생생한 현장이 세계언론에 보도되면서 신군부의 부도덕성과 부당함을 여과없이 알렸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진압 주화의 모델로 정립되고 있으며 이른바 민주주의와 인권의 수출국으로써 입지를 굳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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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티에서 무단으로 퍼옴... ^^
철원이 아자씨 글...
퍼오면서 하나 더 붙이자면,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날은 언제쯤이나 올것인가. 스스로도 반성해야 할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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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이 흑인이라고 언제 사람같이 취급이나 했느냐. 어렵게 혼자 살때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잘 되면 쳐다보고 그렇지 않으면 쳐다도 안보는 게 한국 풍토 아닌가."-하인스 워드 모친의 오마이뉴스 인터뷰 기사 중에서- 고마해라, 애국질... 더이상은 몇몇 이해 관계자들과 자폐증 환자들을 제외하고 황우석 사태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없다. 그저 막바지를 향해 치닫는 검찰수사의 최종결론을 지켜보며 세기적 과학사기의 종주범과 비정상적 국세 횡령사건의 복마전이 밝혀지는 것만 남은 셈이다. 그리고 이후의 문제는 지금도 현장에서 묵묵히 연구에 매진하는 일선 과학도들의 땀과 눈물이 헛되지 않도록 과학계와 정부가 새로운 발전 청사진을 함께 내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더이상 이로 인하여 수십조의 국익이 현실화된다고 선동했던 정신나간 오바꾼들의 목소리는 온데간데 없다. 그러함에도 어쩌면 우리 국민들은 복도 무척 많은가 보다. 황우석 사태로 인하여 온 국민이 갑자기 줄기세포에 대한 교양과 상식을 학습을 받더니, 급기야 어쩌다가 걸리는 AFKN에서나 간혹 보았음직한 미국의 슈퍼볼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대화판의 왕따가 될 지경이 아닌가? 막말로 과거 정치판에서 떠돌던 이인제 학습효과보다 범위와 파장이 훨씬 컸던 황우석 학습효과의 후속편이라고나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나 하인스 워드를 둘러싼 부끄러움도 모르는 언론의 애국질의 당사자들마저 슈퍼볼의 영문표기가 Super ball이 아니라 Super bowl이란 사실이라도 제대로 알기라도 하는 것일까? 급기야 한국언론의 비뚤어진 과잉관심이 얼마나 부담스러웠으면 하인스 워드의 모친이 보다못해 "한국 사람들이 흑인이라고 언제 사람같이 취급이나 했느냐. 잘 되면 쳐다보고 그렇지 않으면 쳐다도 안보는 게 한국 풍토 아닌가"라고 일침을 가했을까? 어쩌면 그녀의 일침은 모든 과정과 원칙의 문제는 철저히 외면하며 강자 중심주의로 움직이다, 한 개인이 엄혹하고 처참한 상황 속에서 이룩한 땀과 눈물의 결정체만 알량한 국가의 자산으로 횡령을 하려는 빗나간 사회작동원리에 대한 분노이자 시니컬임에 분명하다. 즉, 황우석을 통한 약발이 떨어지자 하인스 워드를 내세워 '성공=애국'이라는 정글의 등식을 성립시키려던 언론의 과잉 애드립과 오바액션은 대가리를 싸안고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다행스럽게 하인스 워드의 모친은 황우석과는 달리 언론의 선동적 애국질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는 그녀가 살아왔던 삶의 과정 속에서 인식한 남한사회의 이중성과 가식에 대한 거부이며, 또한 우리 모두에게는 사회적 사각지대를 바라보는 올바른 인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숙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과연 입만 벌리면 태극기와 대한민국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과 그녀의 쓰디쓴 일갈 중에서 진정으로 남한 사회를 따뜻하고 밝게 가꾸어 가는데 어느 것이 더욱 소중하고 값진 것일까? 노동자들의 삼보일배와 자본의 공갈 얼마전 두꺼운 외투마저 얼게 만들었던 추위 속에서 휘황한 테헤란로의 인도를 네 발로 기어가며 자신들의 권리와 처우를 주장했던 하이닉스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더미 사이에서 삼보일배를 거듭하며, 단 한 꼭지의 9시 뉴스로도 알려지지 않는 하이닉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의 진실을 온몸으로 알리고자 손발이 땡땡 얼도록 박박 기었다. 하지만 여전히 노무현 정권은 누더기 비정규직법을 강행하려 한나라당과 입을 맞추고 있으며, 그 잘난 네티즌들과 언론은 차라리 '왕의 남자'에 열광하고 추락한 황우석에게 링거를 꽃아대기에 바쁠 뿐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뻔뻔하기 그지없는 자본의 쿠데타 계획이 터져 나왔다. 얼마전 남한사회 자본의 사령부인 한국경제인총협회의 회장이라는 사람은 비정규직 완화와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양대노총의 총파업 선언에 "이제는 비정규직 법안이 친노동 일변도로 처리되면 기업도 파업을 불사하겠다"고 공갈을 친 것이다. 사실 자본파업은 노무현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그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입맛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경제정책을 요구하며 사실상의 투자회피와 유휴자금의 투기화에 열성적이었다. 그들은 노무현 정권의 방향없는 시장영합적 정체성을 진작부터 꿰뚫어 보고, 현재 남한사회의 불안정한 경제상황과 국민 일반의 경제적 불안감을 볼모로 자본에 대한 전면적인 굴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솔직히 이쯤이면 알게 모르게 숱하게 존재하던 남한사회의 자칭 애국자들은 어디서 뭐하고 있나 모르겠다. 물경 자본이 나서서 국가를 말아 먹겠다고 큰 소리치고 있는데도 말이다. 자, 솔직히 말해보자. 엄동설한에 제 몸을 굽혀 네 발로 기어가며 외치는 하이닉스 노동자들의 비정규직 완화와 처우개선 요구에 대하여, 모든 공장설비를 외국으로 뜯어가겠다고 국민과 정부를 협박하는 경총의 짓거리를 어찌해야 하는가? 아니, 답하기 어려운가? 수출실적이 최고조에 달하여 돈더미를 은행과 부동산에 쌓아 놓고도, 비정규직에게만큼은 단 한 푼도 물러서지 못하겠다고 을러대는 이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거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되었지만 고작 실질적인 실효성이 없는 권고사항 정도로 입을 씻고, 오히려 모든 임금노동자의 비정규직화를 위해 법안의 날치기 통과를 저울질하는 이놈의 노무현 정권을 어찌 생각해야 하는가? 이제 우리는 영양가없는 애국질에 넌더리를 내야 한다. 오히려 아프지만 진실을 직시하고 쓰라린 성찰의 매를 서로에게 들이대야 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죄지은 놈은 죄값만큼 받아야 마땅하고, 적어도 대한민국의 국적자에게는 모든 헌법상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나는 그것이 정석이고 민주주의라고 알고 있다. 아무리 알량한 돈으로 떡칠을 한다 해도 범법의 죄과는 분명하게 별개로 물어야 하며, 가당찮은 핑계로 자본파업을 읊조리는 놈들의 행위도 국가전복 예비 음모로 단죄해야 마땅하다. 막말로 노동자들은 파업을 예고만 해도 경제부처가 나서서 공권력을 운운하며 난리더니, 자본가들은 자본파업을 운운해도 본척 만척 넘어가는 것이 정상적인 나라이며 여론이란 말인가? 모든 국민의 헌법상 권리를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는 더이상 국가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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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대공계 형사의 추억
폴티에서... 글마님이 산하님글 퍼온거 다시 퍼 왔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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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대공계 형사의 추억
http://bob.jinbo.net/album/down.php?table=albumpiece&no=1449
산하 | 2006-02-14 00:59
제 선배들은 물론이거니와 얼치기였던 저보다 열심히 살았던 동기나 후배들은 ‘대공계’ 형사들하고의 인연이 한 자락 걸쳐진 사람들이 많습니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제게는 대공계 형사라면 어려서 열심히 보던 드라마 ‘추적’이나 ‘113 수사본부’에서 영웅적으로 그려졌던 형사들 외엔 별 기억이 없습니다.물론 학교 앞에서 등굣길의 저를 날카롭게 검문하고 가방에서 나온 조국통일 머리띠를 들고서는 일장 훈계를 했던 사람도 대공계일 것이고, 가끔 학교 앞에서 선배들이 ‘저게 오 형사야.’라고 일러주던 반백의 신사도 학교를 담당했던 형사였겠지만, 어두컴컴한 방에서 그들의 취조를 받거나 혹여 제가 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될 정도로 ‘큰 인물’이었던 적은 다행히도 (불행히도?) 없었습니다.
그렇듯 순진한 민간인(?)으로 학창 시절을 보냈고 지금도 선량한(?) 시민으로 살고 있는 제가 과거의 이 ‘대공’ 형사들을 경향 각지로 찾아다니며 면접할 일이 있었습니다.미처 몰랐던 얘기입니다만 요즘은 아예 ‘대공계’ 또는 ‘대공과’라는 이름이 아예 사라졌더군요.즉 보안과라는 이름으로 불리웁디다.제가 만난 형사들 가운데 인천에서 근무하고 있는, 정년퇴직을 1년 앞둔 형사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과 하루 종일 서울과 인천을 쏘다니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됐었지요.고 박종철씨의 죽음을 덮으려 했던 박모 치안감이 얼마나 유능한(?) 간첩 잡이 전문가였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고문에 가담했던 조 아무개라는 사람은 대구에서 날고 기는 대공형사였는데 서울로 스카우트(?)된 지 몇 달만에 신세를 조져 버려서 인생만사 새옹지마의 실례가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운동권 총동원령이 내려졌던 86년 5월 3일의 인천의 생생한 기억들..... 이른바 한때 ‘적의 심장부’(?)에서 활동하던 늙은 수사관의 회고를 듣는 것은 색다른 재미가 있었습니다.지금은 이름조차 아득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범인 문 아무개가 지금 뭐하고 사는지 많이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끌러도 풀어도 다하지 않을 것 같은 베테랑 대공 형사의 이야기 보따리 끝에 제가 툭 질문을 던져 봤습니다.
“간첩 잡아 보셨어요?”
“.......심문은 해 봤죠.”
“아니 수십 년 동안 많이 잡으셨을 거 같은데.”
“학생들이나 위장 취업자들은 잡아 봤지만.... 걔들은 간첩은 아니고.....”
별 뜻 없이 하신 말씀이실 수도 있지만 저는 그분의 짤막한 말, “학생이나 위장 취업자들은 잡아 봤지만 걔들은 간첩은 아니고.....”에서 다양한 느낌을 받았습니다.자신의 공적(?)을 과장하거나 불려서 늘어놓고 계신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대적했던 사람들에 대해 약간의 연민을 지닌 듯 보인다는 것.
제 다음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그 중에 젤 기억에 남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과연 그 입에서 어떤 이름이 나올지 저는 궁금했습니다.왕년에 박노해를 길렀노라 기염을 토하다가 지금은 참말이지 보면 토 나올 것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김 아무개 의원님이나 인천에서 오래 생활했을 노회찬 의원이나 그 외 지금은 쟁쟁한 기라성이 되어 버린 사람들의 옛날 이야기가 흘러나오지 않을까 적지않이 기대를 하기도 했지요.
“하나 있네요.그런데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네. 조.... 뭐였는데 서울대 79인가 80인가, 아니 훨씬 더 아래일 수도 있고.....”
서울대 법학과 출신의 조 아무개 학생은 학교를 마치지도 않은 채 인천의 어느 공단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여 암약(!)하다가 공장주의 신고로 결국 이 형사님한테 덜미가 잡혔답니다.어쩌면 지금 제 앞에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우지 않는 이 형사님도 당시엔 저승사자같이 무서운 몰골로 그 학생 앞에 섰을 수도 있겠고 맛 좀 보라고 고춧가루 그득 탄 물을 코에 들이부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짐짓 소름이 돋았습니다.한 개인의 인간성 따위는 처참하게 망가지는 시대의 첨병들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왜 기억 나시죠?”
“밥을 주니까, 왜 그 천주교인들이 성호를 긋잖아요?그런데 걔는 구호 외칠 때 팔 뻗는 거, 그걸 세 번 힘 있게 내지른 뒤에 밥을 먹더라고.내가 데리고 있었던 내내 그랬어.구호를 외치는 것도 아니야.그냥 척 척 척 세 번 딱 하고 밥을 먹어.”
“그리구요?”
“말도 없는 놈이었어요. 샌님도 그런 샌님이 없었어.주변 조사해 보니까 뭐 의식화같은 걸 시도하지도 못했더구만.그렇게 수줍어했대. 사람들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못했다더라고.위장 취업이라는 것도 좀 붙임성이 있고, 사람들하고 사와리가 좋아야 뭐 하는 거 아니우.그런데 녀석은 영 아니더라고. ”
“그리구요?”
“잡혀 온 놈들 중에 말 잘하는 놈 참 많았거든.그런데 걔는 진짜 말 한 마디 안 했어. 취조할 때도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거나 그게 다였어. 하지만 그런 느낌 있잖아. 아 이놈은 진짜구나. 겁도 안 먹을 것 같고, 눈치도 안 볼 거 같은 놈.밥 먹으면서 걔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팔을 뻗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는 그 샌님이 무섭더라고.좀 말을 시켜도 한 마디도 안해.마치 벙어리처럼.”
단지 그 이유로 기억에 남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싱겁다 싶었습니다.말 한 마디 제대로 나눠 보지 못한 사람이 형사 인생 수십 년에 제일 큰 기억으로 남았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지요.서울 법대를 나왔다니 그래도 고시라도 봤을 것이고 어느 동네에선가 인권 변호사 쯤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싶어 지금은 뭘 하는지 아시냐면서 심드렁하게 물었을 때 형사님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죽었어요.”
“네?”
“집행 유예로 나왔거든.그런데 다른 공장에 또 갔다는 건 들었어요.어느 날 부평역 앞에서 녀석을 우연히 만났지. 그래 역 앞에서 한 1시간 동안 붙잡고 훈계, 아니 하소연을 했어.너 제발 이렇게 살지 말아라.녀석은 강원도 태백인가가 고향이었어.아버지는 광부였고. 그 아버지가 얘가 서울 법대 갈 때 얼마나 좋아했겠어.모르긴 해도 동네 잔치를 3박 4일 했을 거야.막장 인생에서 용 난 거 아냐.그런데 그런 자식을 내 손으로 잡아 넣었고, 또 그런 일을 한다고 하니까 내 가슴이 다 아프더라고요.빌었다니까. 걔한테..... 나중에 너 잘 된 뒤에 네가 하고 싶은 일 하면 되는 거니까, 제발 학교로 돌아가라구요. ”
그 만남이 있은 지 달포가 지났을 때 형사님은 동료가 전하는 조 모 학생의 비보를 들었습니다.위장 취업 중이던 공장에서 밤샘 작업을 하다 깜박 졸았고 그예 컨베이어 벨트에 말려 차갑고 무거운 기계의 금속성 밑에서 그 젊은 피를 쏟고 말았다는 것이지요.형사님은 그때 자기가 강원도 태백의 고인의 아버지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고 했습니다.“생각해 봐요. 태백에서 서울 법대 간다고 했을 때 그 아버지 얼마나 좋아했겠어.모르긴 해도 동네 잔치를 3박 4일 했을걸......그런데 그 아이가 공장 컨베이어 벨트에서 죽었다......”
그분의 한숨 섞인 회고에 함께 어깨를 늘어뜨리며 지금 살았더라면 그래도 좋은 세월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하고 한 마디를 덧붙이자 그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습니다.“걔는 그런 깜냥도 없었을 거예요. 그럴 놈이면 그 추운 날 길거리에서 자기 잡아넣은 형사 얘기를 1시간 동안이나 듣고 있겠어?뿌리치거나 그냥 가버리면 되지.......지금도 궁금해.걔가 내 얘기를 듣고 있었던 이유가.......겁나서 그랬던 건 분명히 아니고......”
조 모 학생은그 1시간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답니다.그렇다고 형사에게 대들거나 무시하지도 않은 채 묵묵히 형사의 훈계성 하소연을 듣고만 있었다지요. “차라리 이 독재자의 개새끼야 뭐 이런 욕이나 하고 가 버렸으면” 그렇게 맘에 아리지도 않았을 텐데 며칠을 라면으로만 때운 걸 증명이라도 하듯 얼굴은 붓고 손목은 말라버린 채 그는 한 형사의 넋두리를 묵묵히 들어 준 뒤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한 뒤 헤어졌다지요.
지금 어렵사리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신 분의 항소 이유소의 한 구절, “가장 온순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냈던 시대를 살았던, 정년퇴직을 앞둔 전 대공계 현 보안과 형사는 자신이 잡아 넣었던 한 젊은이, 밥 먹기 전 세 번 팔을 뻗으며 뭔가를 다짐했지만 그 다짐을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강원도 출신 젊은이의 짧았던 젊음을 토로하며 여러 번의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 한숨에 실린 듯 멍하니 있다 보니 궁금해지는 게 있었습니다.
“그럼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신 건 없네요? 또 기억나는 건?”
“그렇죠.안녕히 가시라는 인사하고...... 유치장에서 걔가 부른 노래가 있었는데....시끄러운 투쟁가 뭐 그런 건 아니었고......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였나?”
“해바라기의 ‘사랑으로’요?”
“그 노래는 걔가 죽은 뒤에 나왔지. 하여간 뭐 그런 노래였어.”
집에 돌아와서 아내가 손톱을 깨끗이 깎아 준 김에 기타를 잡고 뚱땅거리다가 문득 형사가 채 기억해 내지 못했던 고인의 노래가 머릿 속에 들어섰습니다.아마도 그건 “이 세상 사는 동안”이라는 노래였던 것 같습니다.C 코드로 시작하는 그 노래의 가사와 멜로디를 실로 오랜만에 읊조리면서 저는 근 20년 전 인천 한 공장의 기계 속에서 생을 마감했던 한 사람의 명복을 빌었습니다.그리고 그가 불렀을지 모르는 노래를 1,2,3절까지 다 불러 보았습니다.원래 1,2절은 찬송가였습니다만 3절은 고인과 비슷한 삶을 선택한 누군가가 덧붙였다고 했지요.
그 후렴구입니다.... “너와 나 함께 손을 잡고 이 길을 걸으며...... 죽어도 뺏지 못할 생의 자유를 되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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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글이나 써볼까 ^^
정치(正治)란 무엇일까...
요즘 정치란 것을 보면서 2000년전 로마에서의 정치와 지금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예수가 왔던 그 시기를 생각해본다.
...
예수는 극도로 정치적이었다. 그의 말과 사상은 현재의 막스를 뛰어넘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랬기에 고난을 받았으리라...
그러나, 종교지도자란 사람들은 그의 말과 행동에서 "신념" 혹는 "믿음"부분만을 추출했다.
그 과정은 역사에서와 같다. 믿음이 필요한 이유가 밝혀지면 안되는게 첫번째였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의 자신들의 종교 보존이라는 세속적인 이유도 물론 있다.
...
정치란 무엇일까...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
사람들은 가정에서도 정치를 한다. 어머니는 부부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애들을 동원하고 아버지는 권위를 내세운다.
친구간의 관계의 하찮은 일에서도 영향력 확대를 위해 많은 것을 한다. 이 또한 정치...
사람들은 매우 정치적이면서 정치를 싫다 한다.
더러운 것을 대하듯 말한다. 무지의 소산이며 그것을 드러내는 행동일뿐이다.
무지는 죄악이다. 그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그들의 현재에 있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적극적인 행동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에 대한 의식도 의지도 없다면 정말로 죄악인 것이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무엇인지 잘안다는듯이... 나름대로 분석을 한다.
...
정치... 나는 정치보다 이 나라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훨씬 혐오 스럽다.
나는 되고 다른 사람은 안된다는 의식들...
돈이면 다 되는 사회...
개인의 행복 보다는 조직의 목표, 정파의 이득, 조국의 XXX...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그 무엇이 옳다 할 수 있을까...
...
이 땅에 산다는 것이 참으로 수치스러운 요즘이다.
+_+ Dark Avenger...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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