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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고종석 아자씨 글~~~ ^^

때는 바야흐로 5.31 지방선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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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의 계절 앞에서
고종석 2006-05-31 18:55:13, 조회 : 91, 추천 : 7

politizen.org
대한민국 정치포털, 인터넷 정치공론장, 百花齊放百家爭鳴의 열린 마당2006-06-01



글 잘 쓰는 어느 기자 말대로 '애국의 계절'이 돌아왔다. 애국의 계절이 돌아왔다는 것은 열정의 계절이 돌아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국민국가 시대 최고의 열정은 '나라 사랑'의 열정일 테니 말이다. 이 애국의 열정은 또 이 시대의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열정은 숭고한 열정이면서 비천한 열정이다. 아무려면 어떠랴? 신문 잡지 지면과 브라운관은 이 열정으로 출렁이고 있고, 이 열정의 브로커를 자임한 이동통신업체들은 제 신바람의 불길을 대한민국 전체로 번지게 할 풀무질에 여념이 없다. 아니, 대한민국을 태워버릴 듯한 이 열정의 책임을 매스미디어와 이동통신회사들의 장삿속에 돌릴 일은 아니겠다. 한 언론학자가 적절히 표현했듯, 국민들 스스로가 '월드컵을 기회로 더욱 세차게 뒤집어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애국주의는 미디어와 자본가들이 창조해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 안에 이미 있었다. 미디어와 자본가들은 그것을 고무 찬양하며 팔아먹고 있을 뿐이다.


이 월드컵 애국주의는 썩 나쁘지 않다. 우리 살 깊숙이 새겨진 국민국가 체제가 어차피 애국주의의 열정을 이글거리게 하고 있다면, 그 열정의 마그마를 분출할 분화구로는 총싸움보다 공놀이가 한결 낫다. 물론, 네 해 전 월드컵 때 중국 네티즌들이 '시범적으로' 보여주었듯 이번 월드컵 때도 증오의 언어들이 인터넷에서 춤출지 모른다. 경쟁 국가 팀 응원군중 사이의 충돌로 관중석이 난장판이 될 수도 있다. 너무 잘하거나 너무 못한 선수 하나가 흥분한 관중에게 살해될 수도 있다. 텔레비전으로 제 나라 팀을 응원하던 누군가가 너무 기쁘거나 슬퍼서 심장마비를 겪을 수도 있고, 홧김에 자살하거나 이웃을 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정도의 불상사는 전면적으로 발산된 애국주의의 값으론 결코 비싸지 않다. 폭탄과 총탄이 날아다니는 전장에서 우리가 애국주의의 값으로 치러야 할 그 헤아릴 수 없는 주검들에 견주면 말이다.


이런 공놀이의 우아함 못지 않은 것이 선거의 우아함이다. 비록 월드컵을 앞둔 탓에 이번 지방선거에 쏟아진 열정은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게다가 야당 대표가 겪은 흉악망측한 일로 분위기가 몹시 뒤숭숭해지긴 했지만, 선거는 공놀이와 마찬가지로 열정의 분출구로서 비교적 안전하다. 당파심이나 호승심(好勝心)이 정치 동물로서의 인간에게 내재한 유전자 같은 것이라면, 그런 열정을 예전처럼 칼싸움이나 총싸움으로 터뜨리는 것보다는 선거로 터뜨리는 것이 한결 낫다. 언론은 입버릇처럼 '선거 과열' 운운하지만, 선거에 쏟아지는 열정을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다. 그 '과열 선거'에 고압으로 내장된 사랑과 증오의 합선은 이 민주주의의 발명품을 피흘림 없는 카타르시스 공간으로 만든다. 가장 과열된 선거도 가장 차분한 총싸움보다 백만 배, 천만 배 낫다.


그러나 월드컵과 지방선거에 한국인들이 분배한 열정의 차이에서도 보이듯, 열정이라는 재화는 무한하지도 무차별적이지도 않다. 한쪽의 넘치는 열정은 다른 쪽의 빈곤한 열정을 초래한다. 또 열정은 그 분출자가 대상에 느끼는 심리적 거리에 반비례한다. 월드컵 축구에 대한 열정이 유난히 큰 것은 한반도 남쪽의 주민 개개인이 한국 축구팀을 대한민국 국가와 일치시켰고 자신을 대한민국 국가와 일치시켰다는 뜻일 테다.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라는 한 이동통신회사 광고 카피는 바로 그 예민한 신경섬유를 움켜쥔 지혜의 언어다.


대추리나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해서, 정치인들의 부패나 성추행에 대해서, 결식아동이나 매맞는 여성이나 축구공 꿰매는 소녀에 대해서, 관타나모나 라말라에 대해서 사랑과 증오의 열정이 그 만큼 솟지 않는 것은 한국인 다수가 이들 사안에 자신을 일치시키지 못했다는 뜻일 테다. 어쩌면 이것은 문화적 교육적 차원을 넘어서 인류의 진화 단계에, 다시 말해 생물적 차원에 얽매인 현상인지도 모른다. 대추리고 결식아동이고 까맣게 잊은 채 텔레비전 앞에서 맥주로 목을 적시며 '세차게 뒤집어질' 내 모습이 벌써 아른거린다.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인간의 기품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자동인형의 꼬락서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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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 http://blog.daum.net/coreafocus/2318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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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그 날이 다시 오면…"
'그 때' 특전사 출신 목사가 고백하는 5.18 광주민중항쟁
이경남 / 경기 평택효덕감리교회 목사 , 2006-05-18 오전 10:59:00


1980년은 우리 사회가 격동을 경험한 시대였을 뿐 아니라 나 개인적으로도 고통의 시기였다. 당시 나는 신학대학 졸업을 앞둔 20대 중반의 청년이었지만, 성서의 요나처럼 내 짐을 감당하기 어려워 군대로 도피하는 길을 선택했고, 그런 나를 하나님은 마치 요나를 바닷물에 던지듯이 특전사라는 곳에 가게 하시고, 끝내는 5월의 광주 그 참혹한 현장에 던져지게 하셨다.

그 후 근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그 끔찍한 현장의 기억들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입은 육체의 부상과 마음의 상처로 말미암아 될 수 있으면 그로부터 멀리 떠나 살려 했던 것이다.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는지 모른다. 새로운 각오로 시작한 신앙 생활과 농촌 교회의 목회 여건이 나 자신의 위치를 떠나 심각한 역사의 문제들에 대하여 생각할 만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는 반드시 언젠가는 5월이 되면 광주를 찾아 그 끔찍했던 현장들을 돌아보며 이것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를 생각하고 싶었고, 또 망월동에 누워 있는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경의를 표하고 싶은 희망이 간절했다.




내가 군에 입대한 것은 1979년 5월이었다. 공수 교육과 특수전 교육(구체적으로는 게릴라 침투나 사회 소요에 대비한 훈련)을 마치고 특전사령부 예하 여단에 배치된 것은 9월 말 경이었는데, 다음 달 10월에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이어서 12 · 12 사태가 발생하면서 특전사 장병들은 당시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던 신군부 세력의 기반이 되어 자신들도 모르게 엄청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박정희 전대통령 시해 사건이 있고 난 후 전쟁 경계령인 데프콘Ⅲ가 발동되자 강원도 화천의 최전방 공수여단에서 근무하던 나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긴장된 군생활을 해야 했다. 더구나 12· 12 사태 후 신군부 세력의 집권 의지가 드러나면서 일어난 1980년 봄의 수많은 소요와 혼란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될 공수 요원들의 생활과 훈련을 한없이 고달프게 만들었다.

특전사 주전투요원인 하사관들과 사병들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군부의 의도는 알 수조차 없었고, 단지 대통령이 죽고 나라가 혼란하니 전쟁의 위험이 있고, 그러니 빨리 이런 소요를 진압해야 한다는 단순한 안보 논리만을 믿고 있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정신 교육을 통해 대학생들에 대하여 들은 것이라고는 그들이 모두 좌경용공 분자들이라는 것뿐이어서 자연히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훗날 광주에서의 끔찍한 학살을 서슴치 않게 한 심리적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1980년 신군부 세력의 집권이 광주사태가 발생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서 피치 못하게 전개된 사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1979년 12월 30일경 종무식을 하면서 연초 3일간의 휴무에 들어갈 때 마지막 종회 시간에 들어온 중대장의 상기된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공수 요원들은 점프(낙하) 수당으로 일반 보병 부대의 병사들보다 많은 봉급을 받고 있었는데, 정확히 기억은 못하지만 새해부터는 특전 병사들을 200%의 봉급과 500%의 점프 수당 인상이라는 파격적인 대우 향상을 약속한다는 것이었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들뜨고 즐거워하던 부대원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당시 일병이었던 나도 그 이야기를 믿고 나의 봉급을 계산하니 꽤 큰 액수여서 군생활을 하면서 돈을 좀 모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아마 이러한 조치들은 특전 요원들을 자신의 충성스런 친위대로 만들기 위해 신군부 세력이 의도한 선심이었을 터이다.

1979년 10월 내가 자대에 배치를 받은 이후 특전사 예하의 모든 부대는 정규 훈련을 제치고 소위 진압 훈련만 죽어라 하였다 그때 나는 왜 북한군의 위협이 있다면서 전쟁 대비는 하지 않고 데모 진압 훈련만 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졌었다. 1980년 봄이 되어서는 학생들의 시위와 세 김씨의 경쟁으로 인한 분열로 세상은 암담해지는 것 같았다. 우리 공수 요원들은 본격적으로 시위 진압에 나서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병사들은 강원도 깊은 산 속을 뒤지며 박달나무 같은 튼튼한 나무들을 베어다가 진압봉을 자체적으로 만들기 시작하였고, 시위 조기 진압과 정국의 안정이 시급하며 좌경 분자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정신 교육을 되풀이해서 받았다.

그러다 강원도 화천에 있던 우리 여단이 서울로 대대적인 부대 이동을 한 것은 1980년 5월 초 무렵으로 기억된다. 이는 잠시 시위 진압을 하기 위해 출동하는 게 아니라 아예 장기적인 주둔을 목적으로 한 출발이었다. 매년 7, 8월이 되면 공수부대원들은 바닷가로 나가 몇 주씩 수영 교육을 받는데, 봄에 부대를 옮기면서 수영 교육준비까지 하고 가라는 명을 받았으니, 이는 시위를 진압하고는 부대로 복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비상 계엄과 그 이후의 일들을 계산한 장기적인 계획이 있었음을 뜻하지 않는가?

저녁에 부대를 출발하여 밤늦게 춘천역에 도착한 후 커튼이 다쳐진 열차에 몸을 싣고 새벽에 김포의 공수여단에 도착하던 일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 나는 속으로 ‘6· 25 때 북한 군인들이 포장으로 가린 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이동하였다는데, 이게 무슨 희한한 일이냐’ 하는 생각과 함께 도대체 알 수 없이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5월이 되자 공수 요원들은 신발끈도 풀지 못하고 전투복도 벗지 못한 채 잠을 자며 언제라도 출동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해야만 하였다. 또 비상 계엄이 선포되기 며칠 전인가는 특전사령관이 공수여단 산하의 모든 부대에 1,500만 원씩의 하사금을 내려 우리 대대에서도 400만 원을 받아 돼지를 잡고 술을 마시며 큰 회식을 한 일도 있었다. 그곳에서 대기하며 우리는 정신 교육을 받기도 하였는데, 강사는 부마 사태를 진압한 여단의 한 부대장이었다. 그는 자신들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단호하게 시위를 진압하였는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고 부대원들 역시 그것을 영웅시하는 분위기였다.

그 동안 몇 차례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취소되곤 하더니, 드디어 17일 저녁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는 군용차량에 탑승해 서울 시내로 들어갔다. 차에서 내리고 보니 동국대학교였고, 시간은 자정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우리 중 일부는 학교 내에 있는 시위 학생들을 체포하러 다니고 나머지는 짐 정리를 중단한 채 방송을 듣게 되었는데,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던 이희성 씨가 나와 카랑카랑하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비상 계엄을 선포하며 주요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 여단이 급히 광주로 내려가게 된 것은 다음날인 18일 오후5시 경이었다. 갑자기 다시 짐을 싸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사병들은 영문을 모른 채 제주도에 대대적인 게릴라들이 침투해서 그리로 간다는 막연한 소문만 듣고 불안한 마음으로 다시 차비를 차려야만 하였다. 일부는 먼저 비행기를 타고 출발을 하였고 나머지 부대들은 밤늦게 청량리역에서 기차에 올라탔다. 부대원들은 가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또 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명령대로 행하여야 하는 처지였지만, 그런 생활에 익숙해진 까닭에 어느 누구도 그저 시키는 대로 할 뿐 답답해하지도 않았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시간은 심장 박동과 함께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마침 기차가 경부선을 달려가는 도중 부모님이 목회하시는 평택을 지날 때였을 것이다. 어두운 들을 지나 멀리 보이는 마을의 불빛을 바라보는데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게 밀려왔다. 나는 가방 속에서 내무반에서 가지고 온 책 한 권을 꺼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읽곤 하던 <한국 청년에게 고함>이란 책이었다. 나는 그때 건성으로 그것을 읽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판국에 무슨 책을 읽느냐는 동료들의 핀잔이 귓전을 때렸다.

새벽 2시경에 도착해 보니 광주였고 우리가 들어간 곳은 조선대학교였다. 거기에는 이미 숙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피로에 지친 우리는 대충 짐을 정리한 후 3, 4시경에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몇 시간이나 잘 수 있었을까? 아침 식사도 끝내기 전에 갑자기 출동명령이 떨어져 우리는 급히 단독 군장을 하고 총검을 꽂고 군용트럭에 탑승하여 소위 무력 시위라는 것을 하여야 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전라북도 금마에 있던 한 공수여단이 어제 광주에 들어왔는데 의외로 대학생들의 저항이 거세었고, 이에 강경하게 맞선 공수여단의 진압으로 말미암아 시민들 상당수가 다치고 여론이 나빠지니까 그들을 대전인가로 빼고 우리를 대신 투입했다는 것이다. 우리 부대가 처음 광주에 도착한 19일 오전은 전날의 잔혹한 진압 때문인지 학생들의 시위가 있기는 했지만 간혹 몇백 명쯤 모여 구호를 외치다 군인들이 쫓아가면 도망할 뿐 그렇게 격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오후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학생들의 시위와 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에 화가 난 군인들은 난폭해지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시장이나 거리 어디서고 젊은이들은 무조건 잡아서 두들겨 패고 옷을 벗기고 진압봉과 총검으로 때리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천여 명의 공수 요원들은 흩어져 시위하던 학생들이 건물이나 주택으로 도망을 가면 쫒아들어가 거기 있는 젊은 사람들은 다 데모대로 간주하고 무자비하게 밟고 때렸다. 그러다보니 생업의 현장에서 혹은 우연히 길을 가다가 애꿎게 잡혀 짓밟힌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내가 속한 중대 병사들이 한 여관에 들어가 한 젊은이를 찾아내 얼마나 심하게 다루었는지, 얼굴과 머리에 피가 낭자하고 공포에 질린 그 사람이 살려달라고 애처롭게 빌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런 사정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군인들에게 잡혀 온 사람들은 옷을 벗기우고 군화에 채이며 머리를 땅에 박고 줄지어 앉아 있다가는 군용차량에 실려 공수요원들이 주둔하고 있는 전남대나 조선대로 온갖 학대를 다 받아가며 연행되어야 했다. 시장이나 길가에 서 있던 그곳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처음에는 용감히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태가 도를 넘는 순간부터는 감히 대드는 사람도 없고 다들 눈치만 보며 숨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무자비한 진압을 통해 시내를 평정하고 돌아오던 지휘관들과 공수부대 요원들의 자신만만한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한 마디로 ‘개새끼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감히 까분다’는 식이었다. 19일인지 20일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시내를 돌다 돌아와 보니 조선대 교정에는 군인들에게 잡혀 온 수백 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그 넓은 운동장에서 수십 명의 군인들에게 사정없이 맞고 짓밟히고 있었다. 그들은 군인들이 시키는 대로 시궁창을 기어야 했고, 운동장 선착순을 수십 번씩 해야 했고, 그 중에서도 늦는 이들은 군홧발과 진압봉에 채이고 맞는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또 20일인가 그 다음 날인가도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헌병대가 쓰고 있던 체육관 건물에서 두 명의 젊은이가 하얗게 죽어 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마 차량에 실려 오던 도중이나 아니면 그런 와중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일 것이다. 매맞고 부상당한 학생들을 군용 트럭으로 수송하면서 그 속에 몇 발씩 가스탄을 터뜨린 군인들도 있었다 하니, 그런 와중에 죽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그런 처참한 상황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20일 오전 오후 내내 우리는 시내를 돌며 시위를 진압하였는데, 군인들이 그렇게 하면 할수록 직접 시위에 참여는 안했지만 사람들이 더욱 늘어 거리에 가득하게 모이던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아마 사태가 이 지경이니 궁금하기도 하고, 달리는, 감히 겁이 나서 시위 대열에 끼지는 못하지만 시위에 대하여 무언의 지지를 보내고 공수 요원들에 대한 증오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이런 분위기를 느껴서인지 어떤 군인들은 “전라도 들은 다 죽여야 해”라는 극언을 서슴치 않고 하기도 하였다. 우리들 가운데 다수는 이미 맹목적인 분노의 노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날은 전날 같지 않게 그렇게 심한 폭력이 행사되지는 않았다. 사태가 너무 심각하게 돌아가는 것을 본 지휘관들의 자제 명령도 있었고, 또 군인들의 위압적인 진압으로 일시나마 학생들의 시위 대열도 흐트러져 본격적인 시위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저녁 늦은 시간부터 시위대의 숫자가 급격히 불어났다. 군인들은 자제하여 그들을 포위하고 있을 뿐 무력 해산을 시키지 않았는데, 거리에는 시위대뿐 아니라 시민들의 숫자 또한 엄청나게 늘었고,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을 포위한 군인들을 보며 '당신들 대한민국 군인들 맞느냐', '혹시 공산군 아니냐'고 묻기까지 하였다. 차량에 태극기를 달고 시위하는 사람들도 생겨났고 이런 사태 앞에서 부대 지휘관들은 어떻게 할 바를 결정하지 못하고 열심히 상급 지휘관에게 무전으로 연락을 하며 작전 지시를 받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부대의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 군인들은 시위대를 그대로 두고 조선대로 철수하게 되었는데, 이런 모습을 본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군인들을 환송하는 일도 있었고, 시위대는 퇴각하는 군인들을 뒤따르며 군가를 불러 주기도 하였다. 지금까지의 적대적인 태도를 버리고 순순히 퇴각하는 공수 요원들을 보고 군인 대열에 뛰어들어 군인들에게 악수를 신청하고 안아 주기도 하며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시민들의 모습은 참으로 묘한 느낌을 던져 주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기로 사태가 심각한 양상을 보이면서 군인들은 작전상 철수를 하는 것인데, 마치 군인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가는 것으로 여겨 좋아하다가 결국은 더 크게 멍든 게 아닌가하여 씁쓸한 생각이 든다.

그때 그토록 좋아하던 순진한 그 젊은이는 과연 살아남아 있을까?

우리가 퇴각하던 그날 밤 공수요원들이 주둔하고 있던 조선대 앞에서는 무서운 충돌이 일어났다. 아마 9시쯤이었을 것이다. 뒤따르는 시위대를 막기 위하여 군인들은 최루탄을 계속 터뜨리며 퇴각하였는데, 돌아가라는 군인들의 반복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시위대 중 일부가 소방차를 탈취하여 군인들의 저지선을 뚫고 지나가는 위험한 일이 발생하였다. 또 밤하늘에 화광(火光)이 솟았는데 후에 듣기로는 세무서인가가 불에 타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날은 이미 어둡고 사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자 장갑차를 앞에 놓고 공포 사격으로 시위대를 막던 대대장은 무전으로 급히 실탄 사격을 요청하는 것 같았는데 허락되지 않는지 다급한 목소리로 자꾸만 조르는 것 같았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시위대가 돌아가라는 군인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따라온 것은 조선대 내에 잡혀 있는 시민들을 풀어 달라는 요구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에 과격한 일부 학생들이 소방차로 저지선을 뚫기도 하고 돌을 던지며 기습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때 어두운 밤에 갑자기 날아오는 돌에 맞은 군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도 하였고 장갑차를 앞세워 추격하며 잡히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기도 하였는데, 아마 이 날 밤이 광주사태에서 본격적인 살륙이 시작된 날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고삐 풀린 상황 앞에서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쩌다 나는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눈앞에 전개되는 풍경들은 어떤 질문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곳은 대학 앞 주택가였을 것이다. 사방에서 터지는 총성과 최루탄 연기에 주택가의 불은 다 꺼지고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절규와 고함들과 비명들로 범벅된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그때 나는 거리에서 군인들에 의해 맞아 거의 초죽음이 된 한 시민을 발견하였고, 순간적으로 부대를 이탈하여 그를 업고 어느 민간인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어쩌자고 그렇게 무모했을까? 그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사태가 사태인지라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누구하나 문을 열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한 골목을 들어서니 자그만 교회가 보이고 그 속에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급히 문을 두드리니 한 노인네가 나오는데 키가 크고 인자한 기품이 있는 백발의 할아버지였다. 그는 처음에는 놀라더니 이내 자신의 서재로 나와 함께 부상당한 사람을 인도하여 들어가게 하였다. 이미 거기에는 군인들의 추격을 피해 숨어 들어온 몇 명의 대학생들이 있었다. 공수부대원 하나가 군화도 벗지 않은 채 소총을 들고 들어갔으니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불빛에 사람을 내려놓고 보니 이미 혼수 상태에 빠져 의식을 잃었는데 이건 말이 아니었다.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의 노동자 같았는데, 머리는 진압봉에 맞아 15센티 이상 벌어지고, 한쪽 팔도 맞아 부러졌는지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날 밤을 그 목사님의 서재에서 몇 명의 대학생들과 함께 보내고 이튿날 새벽 혼자 부대에 복귀하였다.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나는 이로 말미암아 부대 내에서 상급자들과 지휘관들에게 맞기도 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작 두려운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도 나는 그때 학생들이 살해된 동료들의 시신을 끌고 가며 처절하게 절규하며 울부짖고 노래하던 그 소리들을 듣는다.

나는 내가 업고 들어간 그 사람이 누구인지 또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때 그 교회는 학일동에 있는 ‘광주 새교회’이고, 그 목사님의 성함이 정인보였다는 것, 그리고 당시 백발이 성성하셨던 그 목사님은 지금쯤 이미 고인이 되셨을 것이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다.




내가 부대에 복귀한 21일은 광주사태에서 가장 중요한 날일 것이다. 나의 부대 복귀가 무전으로 지휘관에게 알려지고 나는 우리 부대가 쉬고 있던 상무대로 트럭을 타고 가게 되었는데, 군복에 피가 범벅되어 돌아온 나의 모습을 보고 직속 상관은 대노하면서 나를 심히 다루었지만, 그런 가운데도 나는 그가 내게 한 말이 가슴에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밤새 나 때문에 애태운 것을 생각하면 화도 날 만하겠지만 그는 내가 신학대학을 나온 사람이고 평소 문제를 일으키던 사람이 아닌지라 극단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하였다. 그의 말인즉 비상 계엄하에서 부대 이탈이란 즉결 처형감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네가 밤새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다 아는데 여기는 전쟁터이니 제발 정신 좀 차리고 바로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말하며 나의 부대 이탈에 대해 얼마간 때리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은 그 중대장과 다른 지휘관들의 처리에 일말의 고마움을 느낀다.

이 날 21일 오전, 우리는 걸어서 광주도청에 도착하였다. 거기에는 우리 여단의 모든 병력이 집결해 있었는데, 밤새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시위대들이 격노하여 차량으로 무장하고 군인들과 무력으로 대치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군수 공장에서 탈취한 도시형 장갑차를 몰고 돌진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광주 청문회 당시 부대를 지휘한 자가 이 부분을 거론하며 시위대의 장갑차에 의해 군인들이 희생당하면서 발포가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광주사태에 대한 법원의 최종적인 기록에도 그렇게 되어 있는데, 내가 아는 바로는 결코 그렇지가 않다.

시위대가 장갑차를 몰고 도청 앞에 나타날 때에는 거리에 군인들이 서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고 도청 앞에서 우회전하여 빠져나가고 말았다. 장갑차에 의해 공수부대원이 치어 죽은 것은 당시 우리 여단에서 몰고 다니며 사격을 하던 군인 장갑차에 의해서이다.

나는 현장을 똑똑히 목격하였는데, 여러 차례 협상을 통해 시위를 보장받으려던 사람들이 협상이 안 되니까 급기야는 차량을 몰고 돌진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다급해진 군부대의 장갑차가 급히 퇴각을 하면서 넘어진 군인을 덮치게 되고, 그가 현장에서 즉사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장갑차의 무한궤도 밑에 하반신이 깔린 그 병사의 상체가 위로 들려지며 입에서 붉은 피를 쏟아내던 처참한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특전사에 배속된 지 얼마 안 되는 신참내기 병사였다.



충장로 거리에서 태극기를 들고 파이프나 몽둥이로 무장을 하거나 트럭이나 버스를 탄 시민들이 군인들과 대치하게 되었을 때, 너무도 사태가 위험하고 다급하여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고 당황하던 부대 지휘관들의 안쓰러운 모습도 생각난다. 나는 비교적 대치선의 뒤에 있었기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덜 받았으나, 아마 최전방에서 시위대와 가까운 거리를 두고 대치하던 군인들은 그들이 차량으로 돌진하려 할 때에 매우 큰 불안에 떨어야 했을 것이다. 하늘에서는 계속 시위대의 해산을 요구하는 헬기의 방송이 나오고 학생들의 구호와 노래 소리는 처연한데, 천여 명의 특전 요원들과 수만의 시위대의 일전을 앞둔 이 일촉즉발의 다급한 상황을 그 앞에서 직접 서 본 사람이 아니면 누가 짐작이라도 할까?

이런 일이 발생하기 전 비교적 아침 이른 시간에 있었던 일도 기억이 난다. 도청 분수대 앞에서 시위대와 군인들이 대치를 하고 있는데, 시내버스를 탄 어떤 사람이 차를 몰고 시위대를 뚫고 나가 군인들에게 위협적으로 돌진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놀란 군인들이 흩어지고 그 차량은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추게 되었는데, 이에 화가 치민 군인들은 분풀이라도 하듯 갑자기 길가로 뛰어들어 지나가는 시민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하였다. 마침 고무신을 신고 잠바차림으로 길을 지나던 40, 50대의 남자가 군인들에게 걸려들었고 그는 금새 진압봉에 맞아 기절하였다.

주변의 사태는 점차 술렁이며 다급해져 갔다. 나는 아무래도 그대로 두었다가는 그 사람의 생명이 위험할 것 같아서 급히 뛰어들어 그를 안고 피신시키려 했다. 덩치가 큰 사람이었고 내 힘만으로는 부쳐 쩔쩔매고 있는데 다른 대대의 중사 한 사람이 뛰어들어 도와주는 것이었다. 물론 그 자리에 있는 수백 명의 공수 요원들이 이를 보았고, 우리는 그를 끌고 안전한 곳에 피신시킨 후 시민들에게 이 사람을 좀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고 돌아왔다. 그때 같은 중대의 상급자 한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내게 대검을 들이밀면서 '너 죽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너는 아군이냐 적군이냐?'

그때 그 질문은 내게 부질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웃으며 대답을 하지 않았고, 그런 내게 그는 한 번만 더 그런 짓을 하면 너부터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우리가 부상당한 사람을 질질 끌어 그늘지고 안전한 곳에 대피시킨 후 멀리 서 있던 시민들을 향해 보살펴 달라는 손짓을 하고 돌아올 때, 차마 군인들이 두려워 가까이 오지는 못하지만 그들 중에는 우리에게 고맙다며 고개 숙여 인사하던 사람들도 있지 않았던가.

전일빌딩으로 기억되는데, 그 앞에서 대치할 때에 청년 한 사람이 창문을 열고 군인들에게 욕지거리를 퍼붓는 일도 있었다. 화가 난 군인들이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잠시 후에 그는 피가 낭자한 채 끌려오게 되었는데, 대검을 목에 대고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군인들에게 창백하게 질려 살려 달라고 애걸하던 그의 공포에 질린 눈과 모습 또한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때의 나는 일병 계급의 신분으로 격노한 상급자들의 살해 의지를 느끼면서 감히 말리지 못하였다. 끌려간 그 사람은 그때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21일의 도청 앞 발포사건은 돌진하던 시위대 차량들로 인해 퇴각하던 군인 장갑차에 의해 우리 대대에 속한 병사가 깔려 죽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일어났다. 장갑차가 밀려나면서 공수요원들의 저지선이 완전히 무너졌고 도청 앞 광장은 돌진하는 시위대와 그들의 차량들로 채워지게 되었는데 다급해진 군인들은 누구에 의해서인지 모르나 사격으로 대응하였다. 발포와 함께 시위대는 흩어졌고, 우리는 도로에 낮은 포복으로 엎드려 몸을 숨기고 있어야만 했다.

내 기억에는 그때 장갑차가 도로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캘리버50 기관총으로 무수하게 사격을 했다. 그것은 단순한 위협 사격이 아니고 분명 실제 조준 사격이었다. 어떤 자는 도청 앞에서 시위대에 의해 발포가 시작되어 대응사격을 하였노라고 말하기도 한 모양이나, 내가 알기로는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시민들이 무기를 탈취하고 무력으로 대응한 것은 이런 일들에 의해 군인의 사격이 시작된 이후의 일이지 먼저 하였거나 함께 사격으로 맞대응한 것이 아니다.

그때는 수백 명의 군인들이 도청 앞 도로에서 무방비 상태로 엎드려 있었는데,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시위대로부터 총격을 입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만약 그랬다면 노출된 우리 중에 하다 못해 다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어야 할 텐데 그런 일은 없었다. 더구나 오후 4시쯤 도청에 있던 우리 여단의 병사들이 조선대로 퇴각할 때 도로를 걸어서 퇴각하였는데 만약 이때에 시위대가 총을 가지고 사격을 할 수 있었다면 이게 가능하기나 한 일이었을까?

도청에서 조선대로 퇴각한 후 우리는 곧바로 긴급한 철수 명령을 받았다. 이 때에 조선대 광장에서 장갑차가 학교 주변의 주민들과 아이들, 그리고 호기심에 찬 구경꾼들을 향해 계속해서 사격을 해댄 것도 기억이 난다. 철수하는 군인들을 보호하고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그랬던 것 같은데 여기서 실제로 조준사격을 하였는지 아니면 위협 사격으로 사람들을 흩뜨리기만 하였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급히 짐을 챙겼고 저녁 7시 경 어두울 즈음 급히 조선대를 떠났는데, 주요한 문서나 장비들을 트럭에 싣고 떠나야 했던 본부대 병력이 시내를 빠져 나오다가 시위대의 총격을 받고 몇 사람이 죽는 최초의 군인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무조건 앞사람만 따라 밤새 걸었고 그 다음날인 22일 오전 11시쯤 되어서야 도착한 곳이 무등산 깊은 골짜기임을 알았다. 거기에는 우리 여단 전 병력뿐 아니라 확실치는 않으나 다른 여단의 병사들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거기서 수송기를 통해 보급된 식량 및 일인당 580발의 실탄 그리고 수류탄이나 가스탄 등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우리 모두는 지친 몸을 쉬며 작전 명령을 기다렸다. 우리는 야만의 숲에 갇힌 맹수와 다를 바 없었다.

그 산중에서는 아마 포로로 잡아 왔던 대학생을 총살하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 일을 나는 보지 못하였지만, 그것을 목격한 다른 대대의 병사 하나가 내가 아는 후배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왜 이런 부대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하더란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다. 당시 그 일은 부대 내에서 소문으로 돌기도 하였는데 그로부터 10여 년 후 공수부대가 머물렀던 그곳에서 총상을 입은 유골이 발견되어 그것의 증거가 되기도 하였다.

어디 그뿐이었겠는가? 다른 대대의 한 중대가 국도변에서 매복을 하다가 시위대 차량을 발견하고 집중 사격을 하여 많은 숫자의 학생들을 사살한 일도 발생하였는데, 당시 그 버스에 탔다가 유일하게 생존하여 후에 그 일을 증언한 한 여학생은 군인들이 피투성이가 된 학생들을 하나하나 확인 사살까지 하였다는 사실을 밝혀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무등산 골짜기에서 22일부터 24일까지 3일간을 머물렀고, 그 후 도청이나 광주 주요 시설들에 대한 탈환 작전 명령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그 사이 이상하게도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가는 취소된 적도 있었다. 아마 많은 희생자를 내야 하는 최종 진압 작전에 대해 한미 군부 내에서 이견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보는데, 나는 아주 오랜 후에야 전쟁에 대비하고 경계 태세에 들어가는 데프콘Ⅲ의 상황에서는 군 작전지휘권이 한미연합사로 넘어가고 미군측의 허락과 동의 없이는 어떤 군사적 행위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음을 알았다.

무등산에서 멀리 어둠에 잠긴 광주를 바라보는 것은 처량한 일이었다. 이미 진압군들은 시내에서 다 떠났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밤만 되면 콩볶듯하는 총소리가 밤새 끊이지를 않았다. 23일 밤인가 시내 진입 작전 지시가 있었다가 취소된 적이 있었고, 그때 피로에 지친 동료 병사들이 텐트에서 골아 떨어져 자던 모습도 잊을 수가 없다. 연이은 작전과 행군으로 우리는 지쳐 있었다. 물이 없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면도도 하지 못한 채 지금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한 순간 뒤에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를 생각지 못하고 그저 배불리 먹고 씩씩대며 자던 그 단순한 얼굴들…

나는 아무래도 임박한 시내 진입과 주요 시설 탈환을 위한 작전에서 큰 희생자가 나고 또 내 생명도 위태로울 것 같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고, 텐트에서 나와 좀 떨어진 한적한 바위 밑에서 기도를 하였다. 너무 피로했고 또 단조로운 군생활에 아둔해져서인지 또렷한 의식을 차리기 어려웠지만, '하나님, 제가 그래도 목사가 되겠노라고 신학대학을 다니던 사람인데, 이제는 무죄한 사람을 죽이여야만 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하지 않았다가는 제가 언제 날아오는 총탄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처지가 되었으니 나로 이 궁지를 벗어나 죽이지도 말고 죽지도 말게 도와주십시오' 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당시 계절은 신록의 봄으로 산하는 한없이 푸르렀고 생명감으로 가득찬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5월 24일, 이 날은 나뿐 아니라 많은 병사들과 시민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날이요 처참한 비극의 날이 된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갑자기 철수 명령이 떨어졌는데, 산 속에 비트를 파고 숨겨 논 배낭과 장비들까지 다 가지고 간다는 것이었다. 이는 전투나 작전을 하기 위한 출동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철수하는 것임을 뜻하였다. 광주 외곽에 있는 송정리 비행장으로 새 거처를 잡고 아마 거기에서 최종적으로 시내 탈환을 위한 작전을 시행하려고 한 모양인데, 천여 명의 병사들이 수십 대의 군용 차량에 탑승하여 장갑차를 앞세우고 비행장으로 출발한 것은 오후 1시경이었을 것이다. 그때 이미 우리들은 개인당 580발의 실탄과 수류탄이나 가스탄 등의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고 시위대의 기습에 대비하여 실탄을 장전하고 경계하며 차량 이동을 하게 되었다. 국도를 따라 한참을 이동하던 중 간간이 민간 마을을 향해 사격을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곳은 광주 시내로부터 멀리 떨어진 시골 마을이었고 마을의 주민들이나 아이들도 시내의 소요와는 무관하게 평소처럼 모내기를 하거나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그런 곳이었는데, 지금도 나는 왜 군인들이 그런 마을을 지나며 사격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 두발씩 들리던 총성은 이내 콩볶는 듯 하는 요란한 소음으로 바뀌었고 논에서 모내기를 하던 농부들이나 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던 어린이들, 그리고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 놀던 아이들이 총소리에 놀라 혼비백산 흩어지고 자빠지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군인들의 말로는 시위대가 나타나 그랬다는데 사실 여부는 모르겠다. 당시 사정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해가 안 되겠지만, 내 느낌으로는 실탄 장전이 된 소총을 가진 군인들이 한편으로는 두려움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움직이는 물체를 향해 본능적으로 사격을 해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후에 알고 보니 이런 와중에 애꿎게 총에 맞아죽은 아이들과 어른들이 여럿이었다.

잠시 후 송암동이라는 곳에서는 그러한 것보다 더 끔찍하고 내가 경험한 광주사태 중 가장 처참한 일이 벌어진다. 광주 보병학교 일개 중대가 무반동포로 무장하고 매복하다가 장갑차를 앞세운 공수부대 차량이 나타나자 이를 시위대 차량으로 오해하여 사격을 해대는 일이 발생한 것이 그것이다. 긴 시간은 아니었고 5분 내외의 짧은 시간이었을 텐데, 그때 나는 도대체 어떻게 군인들이 평온한 주택가를 향해 사격을 해대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며 몸을 숨기지 않고 바라보다가 머리 부분에 총상을 입는 일을 당했다



보병학교 병사들은 무반동포로 앞서 가던 장갑차를 명중시켜 깨어버렸고 뒤따르던 차량들을 향해서도 계속 공격했다. 갑자기 폭발음들이 사방에서 나며 총격이 가해 오자 당황한 우리쪽 군인들은 사격으로 대응하거나 차량에서 뛰어내려 급히 길 옆 도랑으로 피신했다.

내가 처음 무언가 내 신체에 총격이 가해진 것을 느낀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는 총격을 입고 무너지듯 힘없이 쓰러졌다. 분명 머리 뒷부분에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아련히 의식하였는데, 그토록 갑자기 찾아온 죽음으로 인하여 공포와 허무함이 가슴 가득 밀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내게 닥친 것일까? 나는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난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또한 잊혀지지 않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두려움이지만 가족들 특히 어머니에 대한 애절한 슬픔이었는데, 나의 죽음이 알려질 때에 비탄에 빠져 괴로워할 그분들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떠올랐고 그것이 견딜 수 없이 아프게 느껴졌다.

나는 나 자신의 실상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희미하나마 의식이 있었고, 만약 죽더라도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내가 어디에 어느 정도의 상처를 입었고 어떤 상태가 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기가 두려웠다. 그러나 나는 떨리는 심정으로 나를 확인했다. 머리 뒤를 만졌는데 피가 낭자했다. 그리고 그 다음 얼굴을 더듬었는데, 이는 만약 총알이 머리 뒷부분을 때리고 관통했다면 앞으로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얼굴을 더듬어 보았으나 구멍은 없었고 뒷머리 부분의 상처도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멀리서 손짓하는 불빛처럼 깜박였다. 차 안에는 나 홀로 누워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차에서 뛰어내려 도피하는 동료들이 보였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폭발음과 총격 소리, 무엇보다 살아나려면 빨리 차에서 뛰어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몸을 일으켜 차량에서 뛰어내리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내 몸이 천만 갈래로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나뒹굴게 되는 두 번째의 변을 당했다. 아마 무반동포에서 발사된 포탄이 내 주변에 터진 것이었다. 폭발에 휩싸이는 순간 나는 온몸이 큰 방망이로 맞고 찢기는 듯한 큰 고통을 느꼈고. 다가온 죽음 앞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소리치며 울부짖어야만 하였다. 그렇게 두려울 수가 없었다. 온몸이 파편에 뚫리고 찢겨 피투성이가 되고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만신창이가 된 몸을 가누지도 못한 채, 나는 땅에 엎어져 한없이 '아! 하나님, 아! 하나님' 하고 절망 가운데 부르짖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나의 내력도, 신학생이라는 나의 신분도 한 순간 다가온 죽음의 공포보다 더 절실히 하나님을 찾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통의 순간이 조금 지난 후 차츰 의식이 돌아왔는데 주변에서는 여전히 포탄이 터지고 요란한 총격이 오가고 실탄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이러고 있다가 내가 벌집처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상호 오인으로 인한 교전은 잠시 후 멈추게 되었고 평정을 찾은 후 사태 수급이 시작되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동료들의 시신이 즐비하고 그 중에 어떤 것은 뼈가 허옇게 드러난 것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지난 21일 아침 내 앞에서 어젯밤 스무 명을 찔렀노라고 자랑삼아 말하던 옆 중대의 하사관도 있었다.

나는 그저 땅에 엎어진 채 가쁘게 숨을 몰아 쉬고 있을 뿐이었는데 아무래도 호흡에 이상이 오는 것 같았다.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지고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입만 하늘을 향해 벌어지는데 이제 영락없이 죽는구나 하는 두려움이 재차 엄습하였다. 나는 계속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살려 달라고 애걸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신 때문이었을까? 잠시 후 호흡이 다시 돌아오고 비로소 나는 내게 벌어진 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리를 돌려 몸을 살펴보니 오른쪽 팔꿈치는 피가 흐르고 파편이 박혀 움직일 수 없었고 왼쪽 겨드랑이와 심장 사이에도 피가 홍건히 배어 있었다. 이마에서도 피가 흐르고 왼쪽 다리는 피에 절었는데 부상이 큰지 극심한 통증만 느껴질 뿐 몸은 아예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겨우 오른쪽 팔만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는데 얼마나 목이 타던지 조심조심 수통을 꺼내 약간의 물을 마시니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다행히 실탄이나 파편들이 몸의 중심부를 지나지 않아 살 것 같다는 생각을 들었다. 몸이 포탄의 파편들에 휩싸일 때 천상의 날개가 나를 감싸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측은하게 생각하여 도와주시려 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아비규환의 지옥에서 처참히 죽어가야 했던 사람들은? 그때 나의 마음은 정확히 어디로 향하고 있었을까? 정신이 좀 든 후 나는 동료들에게 발견되어 옷을 다 찢기고 벗기운 채 병원으로 후송될 때까지 누워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에이 씨팔! 이런 개죽음 당하자고 군에 왔단 말인가'하며 내게 그런 원치 않는 불행을 강요하는 알 수 없는 세력들을 향하여 욕을 퍼붓기도 하였다.

내가 알기로 이 일로 말미암아 9명의 군인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2명은 병원에서 죽었으며, 40명 이상의 병사들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 동료들의 죽음과 부상을 목격한 군인들이 어리석고 무모한 분노에 사로잡혀 주변 마을을 찾아가 동네 젊은이들과 가축들을 쏴 죽이는 만행을 저지른 것으로 안다. 도대체 시내와는 동떨어진 한적한 시골 마을의 주민들과 군인끼리의 오인 사격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아마 그런 만행을 행한 일부 군인들은 광주 사람은 곧 적이라는 적개심으로 그런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저질렀을 것이다. 앞서 기술하지 않았지만 도청 앞에서 장갑차에 군인 한사람이 죽게 되었을 때, 그와 가까운 하사관 한 사람이 부하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 난사를 하였노라고 으쓱대던 기억이 겹쳐진다

당시 시위를 하던 학생들을 끝없이 좌경용공 분자들로 가르치던 군대의 정신 교육, 아니 세뇌 교육의 결과란 이토록 무서운 것인가? 나는 그런 일을 서슴지 않았던 같은 부대의 상급자들을 아는데, 그들은 지금쯤 그런 자신들의 만행에 대하여 후회하는 마음이라도 가질까? ‘화려한 외출’이라고 명명된 그날의 비극은 그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장갑차가 깨지면서 그 속에 타고 있던 6명 중 3명이 죽고 대대장을 비롯한 3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그 중에는 전역을 열흘도 안 남기고 죽은 억세게 재수없는 병사도 있었고, 곱상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사병들과 시위대들에게 난폭하게 행동하던 참모 한사람도 있었다. 또 비록 진압군의 일선 지휘관으로서 시위 진압의 책임을 떠맡고 원치 않는 학살의 악역을 맡기는 하였으나 부대 내에서는 투철한 군인 정신으로 훌륭한 모습을 보여 주었던, 천주교 신자인 대대장은 왼쪽 팔이 잘려 나가는 중상을 입기도 하였다.

긴급히 수십 대의 헬기가 출동하였고 피해의 정도가 심한 순서대로 나는 두번째 헬기로 광주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송되기 직전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하사관 한사람이 복부에 관통을 당하고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철모에 하나 가득 피가 담겨져 있던 그는 숨을 몰아쉬며 살려 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평소 성품이 온순하여 부대 내에서도 하급자들과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병원에서 수술 도중 안타깝게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병원으로 호송된 나는 응급 처치를 받고 피로에 지쳐 깊은 잠에 떨어졌는데 한참 만에 일어나 보니, 그 다음날, 즉 5월 25일 오후 4시경이었다. 거의 24시간 이상을 잔 것이다. 그때에 병상에서 꿈결에 듣던 라디오 소리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한 채 계속 행진곡을 틀며 시위대에게 투항을 권고하는 방송이었고, 그 소리는 처참한 일을 목격한 내게 더 끔찍한 사태를 예고하는 것 같아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병원에는 시위 도중 군인들에게 부상을 입은 학생들이나 민간인 부상자들도 격리되어 치료를 받고 있었다. 거기서 만난 조선대학교 심리학과 4학년 여학생은 등에 총을 맞고 누워 있었고, 그녀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기가 막히는 것이었다. 그녀가 시위에 참여하게 된 것은 군인들에 의해 맞아 죽은 시신을 보고 나서였다고 했다. 마치 튀김가루를 묻혀 튀기듯 사람의 시체를 페인트로 범벅해 놓은 것을 보았다는 그녀의 이야기는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당시 군에서는 시위 주동자를 잡기 위해 화염방사기에 페인트를 넣고 쏘아 맞힌 다음 잡겠다는 계획을 세운 바 있었는데, 아마 그 사람이 그렇게 하여 희생된 사람이었으리라.

나의 광주에 대한 회고는 여기서 끝난다. 광주사태가 진압된 뒤 나는 연고지를 찾아 대전 통합병원으로 이송되어 광주를 벗어나게 되고, 그 후 입퇴원을 반복하며 9개월여의 병상 생활을 하게 된다. 후에 부대로 복귀한 후 광주사태를 마지막으로 마무리한 27일의 작전에 참여한 병사들의 이야기를 간혹 듣기도 하였지만, 그 끔찍한 전말에 대하여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바는 없다. 단지 최신의 무기로 무장되고 고도의 훈련을 갖춘 최정예의 공수 요원들을 맞아 카빈과 M1 소총으로 무장하고 단지 의분과 애국심 하나만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가며 도청과 시내를 사수하려던 시위대의 고독과 두려움 그리고 무모함에 한없는 연민과 안타까움을 가질 뿐이다.

그것은 애초부터 수적으로나 전투력으로나 상대가 될 수 없는, 죽기를 결심한 행위일 뿐 구차히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27일 새벽 무사히 시내 탈환 작전을 마무리한 특전사가 승리자인 양 그 전공을 자랑한다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일국의 최정예 군부대가 아무런 훈련도 작전도 없이 급조된 시민들과 학생들로 구성된 소수의 시위대를 무참히 학살하고 이겼노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내가 듣기로는 막상 군인들이 진입하였을 때 시위대는 차마 총도 쏘지 못하고 망설이는 어린 학생들이었다는데…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곧장 올라가다 보면 마지막 묘역의 좌편에 광주에서 죽은 20여 명의 군인들의 묘비가 있다. 바로 그 옆에는 6·25 때 전사한 국군 장교들의 묘비가 있고, 거기에는 1950년 6월 26일 의정부에서 전사한 나의 큰아버지 묘비도 있다. 나와 내 가족들은 매년 현충일에 그곳을 들르면서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동료들의 묘비도 돌아본다. 한국 전쟁의 와중에서 4형제 중 세 명을 잃은 불행한 일로 인해 평생을 슬퍼하는 부친께서는, 바로 그 옆에 너도 묻힐 뻔하였다면서 어처구니없는 죽음에 던져졌다 기적같이 살아난 자식을 바라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신다.



과거 5공, 6공 시절에는 광주에서 죽은 병사들의 묘비에는 언제나 그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국난을 극복한 것을 자랑스레 여기는 특전사 전역 병사들의 모임도 있어 왔지만, 군부 세력이 몰락하고 광주에서의 만행과 그들의 비행이 천하에 알려진 뒤로는 그런 모임조차 흐지부지 사라지고 다만 사랑하는 자식들의 애꿎은 죽음을 슬퍼하는 유족들의 조문만이 겨우 이어질 뿐이다. 내가 잘 아는 그들의 묘비에는 일병이었던 사람이 상병으로, 중사였던 이들이 상사로 진급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도대체 이것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광주에 투입되어 그저 시키는 대로 하다가 고귀한 목숨을 잃어야만 했던 그들의 불행과 가족들의 비극이 보상될 수 있다는 말인가?

광주의 그 불행한 사건이 일어난 후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간 폭도들의 난동으로 매도되었던 광주사태는 이제 신군부 세력에 용감히 맞서 싸운 민주화 운동으로 명명되었고, 그날 죽어갔던 광주 시민들은 폭도라는 부끄러운 이름으로부터 민주화 운동의 선구자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되찾기도 하였다. 또 그때 국가 변란을 획책했다 하여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가기도 했던 사람들은 이제 이 나라의 통치자가 되었고, 반대로 이들을 탄압하던 당시 신군부 세력들은 그들의 죄상과 함께 재임 기간 중의 비리가 드러나면서 감옥에 다녀오기도 하여, 사람들은 이제 그들이 어떤 종류의 인간들이었나 하는 것쯤은 다 알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제 그 참혹했던 역사의 비극은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매년 5월이 오면 나는 광주가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지난 20년 가까이 나는 내 마음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차마 그곳으로 발을 옮기지 못하였고, 올해도 역시 그랬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5월의 광주를 찾아가고 싶다. 가서 그날 어둠이 내린 하늘을 향해 부르짖던 의인 아벨과 선지자 스가랴의 피의 절규처럼 울려 퍼지던, 지금도 하늘과 땅에서 울려나오고 있을 죽어간 자들의 슬픈 목소리를 듣고 싶다.

나 혼자만이 아니다. 그때에는 사랑하는 자식을 죽음의 구덩이에 보내고 그로 인해 한없이 마음 태우셨을 노년의 부모님과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도 함께 가고 싶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는 나의 총명한 자녀들에게 광주의 아픔은 물론이고 죽은 자들의 진실과 사악한 권력의 위험을 가르치고 싶다.

끝으로 아직도 살아서 지난 날의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준동하는 전두환을 비롯한 5공의 권력자들에게, '이 나라에서 당신들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며 자숙하라'는 충고를 하고 싶다.

* 사진을 제공해준 518기념재단에 감사합니다.
(뉴스앤조이/코리아포커스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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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잡다한것/스크랩2006. 5. 16. 10:37

출처는 아마도... 이너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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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의 전개과정 등

1979년 10월 16부터 20
일까지 부산과 마산의 시민, 학생들은 정희 정권에 대항한 반 독재투쟁을 벌였다. 김영삼총재의 의원직 제명안이 국회에서 변칙 통과된 것에 자극을 받은 부산대생이 교내시위에 이어 거리로 나와 부산시청 앞에서 시민들과 합세하여 유신철폐, 독재타도, 야당탄압중지 등을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경찰력이 무너지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 무력 진압했으나 시위는 마산으로 번져갔다. 마산대생과 경남대생을 선두로 시위에 나선 시민들은 경찰과 맞서 격렬하게 충돌하였다
.
19
일 저녁에는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까지 합세, 시위가 기층민으로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20일을 기해 위수령을 선포하고 무력 진압한 결과 이틀간의 마산시위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부마항쟁의 불씨는 10
·26사태를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1979년 10월 26
박정희 대통령의 저격사건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의 갈등이 폭발한 정치적 돌발사태였다. 유신체제는 긴급조치를 선포하고 민주주의를 압살한 군사독재체제였다. 국민들은 1978 12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에게 더 많은 지지표를 던졌고 김경숙의 죽음을 부른 YH여공농성사건, 야당총재 의원직 제명사건, 부마항쟁의 폭발 등 그 저항이 최고조에 달했다. 유신정권의 말기 권력내부의 암투와 맞물려 1979년 10월 26 18년간의 장기 집권을 누려온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사망함으로써 마침내 유신체제는 붕괴되고 말았다. 이후 실세로 등장한 신군부와 구군부 사이에 군권장악의 권력투쟁이 야기되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이용하여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무력 점령하는 12
·12 하극상 군사쿠데타를 성공시켜 반대세력을 강제 전역시키고 12·12 군사반란세력을 규합, 권력을 장악했다.

1979
10
·26사태이후 서울의 봄은 신군부의 유신연장 음모에 의해 안개정국 속에서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 1980 3월 신학기부터 각 대학에 학생회와 평교수회가 부활되고 긴급조치로 밀려났던 해직교수와 제적학생들이 학교에 복귀함으로써 학원민주화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노동자들도 노조 민주화, 근로조건 개선을 내세우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27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힘의 응집을 위하여 집회와 가두시위를 일제히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5 14일 광화문, 종로 등에 5만여명, 15일에는 서울역 광장에 학생, 시민 20만명이 운집하여 계엄철폐, 민주화 추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학생지도부는 국민의 의사가 충분히 전달된 것으로 판단하고 17일부터 정상수업을 받으면서 시국을 관망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계엄사령부는 학생시위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틈을 타서 5·17비상계엄확대조치를 선포함에 따라 그 동안 용솟음쳤던 민주화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1980
4월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학생들의 민주화투쟁과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진압하고 정권장악을 목적으로 일부 정치군인들이 1980년 5월 18 0 기해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단행하였다. 계엄사령부는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및 옥내외 집회 시위의 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직장이탈 및 태업파업의 금지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로써 정치인의 손발을 묶고 학생과 기층민중의 투쟁에 쐐기를 박은 데 이어 18일에는 김대중, 김종필 26명의 정치인을 학원, 노사분규 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혐의로 연행하고 김영삼을 연금시키는 등 정치적 탄압을 감행했다. 이러한 조치는 헌법에 규정된 국회통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계엄군을 동원,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한 채 취해진 불법조치였다. 비상계엄의 확대에 따라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부대가 17일 저녁 10시경 광주에 투입되어 전남대, 조선대, 교육대 등에 진주하였다
.

최초 충돌, 전남대 정문 앞


5
·17비상계엄 전국확대로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 정문 앞에서 5 18 10시경 등교 중이던 전남대생들과 출입을 제지하는 계엄군사이에서 최초 광주항쟁의 단초가 제공되었다. 무장 계엄군의 통제에 항의하는 학생 수는 삽시간에 100여명으로 불어났고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엄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등교를 원하는 당연한 권리였고 평화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시위였다.

교문 안에 있던 공수부대는 메가폰을 통해 두어 차례 해산을 종용한 후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학생들을 향해 돌진해 왔다. 5
·18민중항쟁의 최초 충돌이자 과잉진압의 시작이었다. 공수부대는 달아나는 학생들을 잡기 위해 인근 주택을 뒤지기도 하고 이를 저지하는 시민들까지 구타하였다. 이런 공수부대의 포악한 진압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벌였고 이것이 5·18광주민중항쟁으로 전개되었다.

시민의 분노와 저항, 금남로


5
18일 오전 전남대 정문 앞에서 벌어졌던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학생들이 시내에서 가두시위를 하자 계엄군은 오후 3부터 시내로 투입되어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계엄군은 무력 진압행위를 만류하는 노인들과 아주머니들에게도 무차별 곤봉세례를 가했다.
계엄군의 진압작전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진상을 알기 위해 금남로로 몰려들었다. 19일 오전 2
3천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군경의 저지선과 대치하게 되었다. 군경과 시민의 충돌이 시작한 지 30분 정도 지나서 11공수여단 천여명이 트럭 30여대로 도청 앞과 금남로에 진출하여 작전명 "화려한 휴가"라는 말 그대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하였고 34명이 한조가 되어 시위현장의 주변 건물까지 샅샅이 뒤지며 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만행을 목격하고 전해들은 광주시민들은 맨주먹 또는 몽둥이, 각목을 들고 나와 결사 항전하였다.

항쟁의 확대와 첫 발포


5
20일 항쟁 3일째, 오전에는 소강상태였으나 오후가 되면서 광주 시가지는 다시 팽팽한 대치국면으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시장의 상인들까지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기 시작하여 그 인파는 10만여명이 넘었다. 윤상원 등 사회운동 진영에서 계엄당국의 거짓된 선무방송에 맞서기 위해 만든『투사회보』가 시내도처에 수천매씩 뿌려지면서 항쟁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격분한 택시기사들이 200여대의 차량시위를 감행함으로써 소강상태에 빠져있던 시위군중들의 전의에 불을 질렀다. 시내 곳곳에서는 자발적인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11시경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공방전이 격렬해지고 시위대가 차량을 앞세워 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려하자 일제히 발포를 하였다. 이것이 시민을 향한 공수부대의 최초 발포였다. 비슷한 시각에 세무서 앞과 조선대 부근에서도 발포가 있었다. 발포에도 아랑곳 않는 항쟁의 불길은 그 승리의 절정을 향하여 불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신군부의 잔학한 만행


공수부대에 의해 최초로 희생된 김경철은 공용터미널에 다녀오다 공수부대원들에게 붙들려 무수하게 구타를 당한 채 트럭에 실려 후송되었으나 다음날 사망했다. 김경철은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농아였다. 이는 수백명의 사망자, 부상자 중의 한 예에 불과하다. 여성들에 대한 성추행도 무수히 저질러졌다. 시민들 앞에서 어린 여학생들의 옷을 찢고 발가벗기는 만행을 보고 격분한 장노년층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고 공수부대를 몰아내자는 결사적 항쟁의지로 발전했다. 신군부의 만행은 전남대 교내에서도 학생들에게 사격을 가하여 시신을 암매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내에서 연행되어 온 시민들을 교도소 안에서 구타, 사망케 하여 암매장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계엄군의 만행은 5 21오후 1 도청의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시민들을 향해 일제히 집단 발포함으로써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계엄군의 퇴각과 양민학살


5
21일은 석가탄신일로 공휴일이었다. 광주시민들은 어제의 참상을 뒤돌아보고 계엄군의 만행에 항의하기 위해 아침부터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오후 1 계엄군은 시민을 향하여 사격을 하였다.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민들 수십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이때부터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느꼈고 서둘러 무장하기 시작했다. 거센 항쟁에 밀린 계엄군은 퇴각하면서 무차별 발포하여 사상자를 내고 조선대 뒷산을 넘어 화순의 길목인 주남마을로 철수했다. 전남대병원 옥상에 설치한 기관총(LMG)의 위력은 계엄군의 퇴각을 서두르게 하였다.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은 교도소로 퇴각했다. 시 외곽지역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27일 충정작전에 투입될 때까지 광주 외곽도로를 차단, 봉쇄하고 인근을 지나는 차량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또한 송암동으로 이동하던 계엄군과 그 곳에 주둔하고 있던 전교사 병력간의 오인사격으로 군인들이 희생되자 그에 대한 화풀이로 원재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중학생에게 총질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청년들을 끌어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무장시민군의 등장


5
21일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총격에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자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느꼈다. 일부 시위대는 화순, 나주, 해남, 영암 등 시외지역으로 진출해 광주의 참상을 알렸다. 전남의 여러 지역에서 응원 시위부대가 왔다. 광주시위의 진압에 동원되어 텅 빈 지서, 경찰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M1소총, 카빈소총, 기관총과 탄약, 화순광업소의 TNT까지도 날라져왔다. 이들 무기들이 시민에게 지급되면서 이른바 '시민군'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제 싸움은 시민군과 계엄군의 총격전으로 전개되었다. 최신식 무기의 정예부대와 비조직적이고 낡은 무기로 무장한 시민군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광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혈전을 벌였다. 5 21일 도청 앞에서 전개된 시민군과 계엄군과의 시가전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민군은 자발적인 지도부가 형성되어 무기조작법과 무기관리 등 무기소지자의 통제가 실시되었고 일반차량을 통제하는 등 시민군의 활약은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다.

항쟁 5일째 되는 22,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고 어지러운 거리를 자발적으로 청소하는 등 질서를 회복해가기 시작했다. 시장과 상점들도 문을 열고 전기, 수도 등은 관련 공무원의 지원으로 해결되었다. 많은 부상자들 때문에 혈액이 부족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헌혈자가 잇따랐고 황금동 아가씨들까지 자청하여 제공했다. 치안력이 없는 상황에서도 은행 같은 금융기관에 대한 사고는 한 건도 없었고 금은방 등 일반 상점에도 별다른 사고가 없었다. 시민군과 항쟁지도부의 식사도 시민들의 자발적인 도움으로 해결되었다. 시민군 지도부에서는 차량통행증, 유류발급증, 상황실출입증 등을 발부하는 한편 외곽지대 자체방위를 맡은 시민군과 유대를 갖고 지원하기 위해 기동타격대를 편성, 출동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시민들의 높은 시민정신과 도덕성, 자치능력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

5
22일 거센 시민의 항쟁에 밀려 계엄군이 일시 퇴각했지만 이미 저질러진 엄청난 사태 앞에서 쌍방 모두 슬기로운 수습이 요망되었다.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5
·18수습대책위원회』였다. 이 조직은 명망가이자 민주인사로 알려진 신부, 목사, 변호사, 교수 등 20여명으로 구성되었고 선봉에 선 학생들 중심의『학생수습대책위원회』와 종래의 명망가 중심의『일반수습대책위원회』도 출범하였다. 민주인사나 유지급 중심으로 구성된 수습위에서는 주로 계엄당국과의 대화나 건의, 협의 등을 맡았고 학생중심의 수습위에선 대민 업무를 맡아보았다. 그들은 장례반, 홍보반, 차량통제반, 무기수거반, 의료반 등으로 나누어 활동하였다. 또한 계엄사에 요구한 7개항의 요구조건을 홍보하고 300여정의 무기를 회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엄사의 무성의와 그들의 각본 때문에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무기회수문제도 수습대책위원회의 의견 불일치로 결국 무기반납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는 새로운 항쟁지도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5
18일에 발발한 민중항쟁의 소식은 언론보도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전남일원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18일 오후와 19일에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행해진 무자비한 계엄군의 살상행위는 시외버스 승객들에 의해 퍼져나갔다. 또 시위대중 일부가 아시아 자동차공장의 차고에서 차량을 대거 획득 운행하면서 도내 각 지역에 직접 알리고 응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광주의 항쟁은 전남일원의 호응 속에 각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5 21일의 집단발포 소식은 전남도민의 의분을 사기에 충분했고 이에 화순 나주 영암 강진 무안 해남 목포 등 전남 일원으로 확산되었다. 시위대는 전남뿐만 아니라 전북 등 전국적인 진출을 시도했으나 고속도로와 철도를 철저히 봉쇄한 계엄군에 의해 좌절되었다. 광주는 목마르게 응원군을 기다렸지만 전남 이외의 지역과는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다
.

시민군의 결사항쟁


5
26일 새벽 계엄군이 탱크 등 중화기를 앞세우고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하자 수습대책위원들은 일명 '죽음의 행진'을 감행하여 무력진압을 저지 만류하였다. 이것은 계엄군의 무력 진압작전의 예고였다. 저녁 7 계엄군의 침공이 감지되는 가운데 학생지도부에서는 시민군에 참여하고 있던 고등학생이나 여성의 귀가를 종용했다. 시민군들은 비장한 가운데 마지막 선택이 요청되었다. 항복이냐, 죽음이냐, 민중항쟁의 결전에 서서 전열을 가다듬으며 홍보부에서는 계엄군의 침공사실을 가두방송으로 알렸다. 27새벽 4, 도청 주변에서 총성과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가 울려왔고 도청탈환을 향한 계엄군의 기관총 소리는 밤하늘을 찢는 듯 했다. 구식 무기로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지도부는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갔다. 진압 끝! 그리고 시민군 생존자는 시체더미 속에서 '총기소지자' '특수폭도'로 분류 체포되어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신군부의 무력진압


수습위의 건의사항도 묵살되고 대화도 평화적인 해결도 거부당한 채폭동을 일으킨 총기소지의 폭도로 지목된 시민군들은 죽거나 부상당하였고 생존자는 모두 체포되어 군부대로 끌려갔던 5 27일 새벽, 공수부대원들은 시체더미 위에서 승리가를 합창하며 충정작전을 끝냈다. 도청탈환을 목표로 조직된 특공대는 27새벽 1 30을 전후로 조선대학교 뒷산에서 최종점검을 마친 뒤 시내 주요지점을 향해 잠입, 침투하기 시작했다. 또 시 외곽에서도 시내 중심가를 포위한 채 시민군을 압박해오고 있었다. 전화선은 모두 끊겼고 탱크 지나가는 소리만 금남로의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새벽 4가 지나면서 도청표적은 탱크와 중무장 헬기, 자동화기와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시민군 말살 초토화작전이 전개되었다. YMCA, 계림초등학교도 총검과 군화발 아래 유린되었다.작전개시 1시간 30분만에 도청진압이 완료되면서 열흘간에 걸친 1980 5월의 민중항쟁도 참담한 최후의 막을 내렸다.

5
·18민중항쟁의 부활

1980년 5월 27
새벽, 계엄군의 무력진압으로 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폭도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광주시민의 의로운 항거는 민주화운동의 밑거름으로 다시 부활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당시 광주는 총검 앞에 유린당했으나 역사는 정의의 편이었다. 폭도는 광주시민이 아니라 헌정을 유린한 반란자 신군부 그들이었다. 의로운 광주, 외로운 광주 그러나 전국 각지에서 5
·18민중항쟁의 진상을 알리는 민주인사와 학생들의 5월투쟁이 시작되었다. 투쟁의 선두에 선 유가족들의 소복투쟁은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묵시적 배후조종자 미국에 대한 반미의 불길은 광주와 부산에서 미문화원이 불타고 서울의 문화원이 점거 당하여 "양키고홈"의 구호가 메아리쳤다.

마침내 6월항쟁으로 이어져 신군부 세력들은 6
·29선언으로 항복했고 1988 5공 청산을 위한 '5공비리특위' '광주청문회'가 열렸으며 '역사바로세우기' '전노일당 사법처리'가 이루어져 광주항쟁은 명명백백하게 정의로운 민주화운동의 의거로 부활, 승리하였다.

연행 구금과정과 잔학상


5
·17비상계엄령 전국 확대실시와 함께 이루어진 예비검속으로부터 항쟁기간과 그 이후에 연행된 사람에 이르기까지 광주항쟁과 관련하여 연행, 구속된 사람의 숫자는 수천을 헤아린다. 광주의 전지역을 쑥밭으로 만들고 초토화시킨 토벌작전 그대로였다. 항쟁기간 중 난데없이 들이닥친 계엄군은 집, 사무실, 학원, 도서관, 식당, 시위주변의 길거리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민들을 총 개머리판과 곤봉 등으로 구타하여 트럭에 실어 교도소나 상무대로 연행하였다. 심지어 팬티바람으로 줄줄이 묶어 폭도취급을 하였다. 전남대나 광주역 부근에서 붙잡힌 사람들은 전남대 본관과 이학부 건물에 수용했다가 21 3공수여단이 교도소로 철수할 때 함께 이송되었다. 또한 상무대로 끌려간 사람들은 상무대 안의 교회와 연병장의 임시막사에 수용되었다. 굶주림과 구타, 비좁은 공간에 몇 백명씩 공동 수감되는 등 지옥을 방불케 하는 그날의 참상을 두고 사람들은 "나는 그때 인간이 아니었다"고 회상한다.

죽음과 삶의 갈림길


상무대로 붙잡혀온 많은 사람들은 상무대 영창으로 넘겨지기 전 보안대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며 짜여진 각본에 맞춰 내란음모 선동 등의 죄명으로 수사를 받았다. 특히 신군부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상 연관이 없는 김대중과 관련한 내란음모 조작이라는 각본 수사가 이루어졌다. 김대중으로부터 폭동자금을 얼마 받았느냐는 허위자백을 강요하며 잔인한 고문, 구타, 심지어 같은 동료끼리 때리게 하는 비인격적 모독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폭거를 자행했다.

고문이나 구타를 당한 사람들은 석방이 된 후에도 오랜 시일동안 후유증에 시달려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고 정신질환을 앓다가 사망하는 등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들은 풀려난 후에도 엄청난 공포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숨죽이며 살아왔다
.


이 사건은 5
·18민중항쟁의 진실을 왜곡하고 은폐하기 위해 신군부 세력이 조작한 사건이었다. 공수부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간 5 21일 저녁, 신군부 세력은 TV를 통해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발표하였다. 당시 신군부 세력은 "광주사태는 간첩 김대중으로부터 사주를 받은 광주지역 불순분자들이 국가 전복을 목적으로 선동하여 일으킨 내란 폭동이며 김대중으로부터 거사자금을 받은 정동년이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켜 학원소요사태를 민중봉기로 유도 발전시켰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김대중, 정동년은 광주상황이 발발하기 전인 5 17일 저녁에 예비 검속된 상태였기 때문에 5·18민중항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신군부 세력은 12·12군사반란을 통한 정권장악을 목적으로 김대중을 제거하고자 하였고 김대중의 지지 기반이었던 호남인들의 반발을 회피하기 위한 명분으로 사건을 조작하였던 것이다.

상무대의 법정은 5
·18민중항쟁에 참여했던 구속자들을 재판하기 위해 급조하여 지어졌다. 당시 군부는 5·18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법정에 총으로 무장한 헌병을 입장시켜 놓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가운데 비공개로 421명의 구속자들을 약식재판으로 진행하였다.

각본에 의한 수사, 각본에 의한 형식적 군사재판이었다. 구속자들은 재판시작 전에 민간인 신분으로 합당한 절차가 무시된 군사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항의하였으며 항의표시로 소리 높여 애국가를 불렀다. 또한 구속자들은 재판과정에서 일부 정치군인들의 권력찬탈을 위한 양민학살 만행을 폭로하며 언젠가는 5
·18의 진상이 밝혀져 반드시 정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굳은 신념으로 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판부는 짜여진 각본에 의해 모두에게 사형, 무기징역 등 실형을 선고하였다.


5
·18민중항쟁이 신군부에 의해 무력 진압된 후 전국민은 암울한 침묵의 시대를 보내야만 했다. 5·18학살책임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주문제를 언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구속자 가족들의 피눈물나는 구명운동과 함께 부모자식을 잃어버린 유족들, 부상자들만이 신군부 정권에 맞서 진상규명을 요구하였다.

학생들은 5
·18진상규명을 요구하면서 광주항쟁의 진압 배후로 미국을 지목하고 미문화원 등을 방화하거나 점거농성을 벌이는 등 반미운동을 전개하였다.또한 일부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민주화를 위해 분신투쟁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투쟁은 1987 6월항쟁으로 이어져 신군부의 폭압정치는 심각한 위기를 맞았고 결국 '6·29선언'으로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게 되었다. 6월항쟁 이전까지는 5·18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위령제조차 경찰의 방해로 치를 수 없었고 일반 국민들의 5·18묘지 참배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5
·18특별법 쟁취와 5·18의 진실

1988
년 여소야대라는 정국 속에서 국회 광주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광주청문회가 실시되면서 그 동안 왜곡 은폐되었던 5
·18민중항쟁의 진실이 전국에 보도됨으로써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정부도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함에 따라 추모제 등 5월 행사가 합법적으로 거행되었다. 1992년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5·18학살책임자 처벌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역사에 의한 처벌을 강조함에 따라 학생, 지식인들의 철야농성과 항의성명이 빗발쳤고 학살책임자 고소고발운동이 본격화되었다.문민정부는 잘못된 과거 청산과 사회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전국민적 요구에 밀려 1995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신군부 세력에게 역사와 법과 정의에 의한 준엄한 심판을 받게 하였다. 또한 1997년에는 5 18일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면서 5·18민중항쟁에 대한 제도적 복권이 이루어졌다.

법정 영창의 복원


5
·17비상계엄령으로 민주화를 촉구하는 정당한 시위를 폭동으로 몰아 무력 진압한 후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1984 3월 상무대 이전을 지시함에 따라 부지매각과 군 시설물의 외곽 이전이 추진되었다. 상무대 지역을 신도심으로 개발하면서 도로 및 아파트 건설로 인해 5·18민중항쟁의 역사 현장인 법정 영창이 방치되자 5월 단체에서 법정 영창의 현장보존과 유지대책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주변지역 성토로 인해 건물구조의 안전성 및 현장 보존의 어려움이 대두됨에 따라 차선책으로 인근에 공원을 조성, 당시의 모습을 재현키로 결정하였다.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재사용이 가능한 자재들을 활용하여 1999 4월 현재의 장소에 복원하였다
.

1980년 5월 16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은 존.A.위컴 한 미연합사령관에게 "소요사태 악화에 따라 수도권 질서유지를 위하여 20사단 작전통제권 이양"을 요청하자 연합사령관은 전문을 접수했음을 확인한 후 "귀하의 요청을 승인한다(Your request is approved)"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신군부는 5 20 20사단을 원래의 목적이 아닌 "광주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로 보내도 되겠느냐"며 연합사에 부대이동을 문의하자 위컴은 미국정부와 협의한 후 동의(agreed)함으로써 작전통제권을 이양하였다.한편 5 22일 오후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 고위정책조정위원회(PRC)는 오끼나와에 있는 조기경보기 2, 필리핀 수빅만에 정박중인 코럴시 항공모함을 한국 근해에 출동시키기로 결정했다. 또 미행정부는 "광주사태가 더 악화될 경우 북한의 남침이 우려된다"고 일반국민에게 광주민중항쟁을 부정적으로 부각시켜 신군부를 두둔했고 무력진압을 합법화시켰다. '80년대 이후 반미운동은 민주주의나 양민보호보다 미국의 이익을 위한 체제 옹호적 제국주의에서 비롯되었다
.

군사정권이라는 무거운 탄압 속에 오랫동안 숨죽이고 살았던 한국의 풀뿌리들은 1980년 광주를 통해 어느 한 계층에서만 외쳐왔던 민주 자주 인권 통일이라는 기치를 그들 가슴 내부에 자연스레 구호로 형성시켰으며 '민주주의' '인권사상' '민중'이라는 계층에 비로소 합류할 수 있는 시민 민주주의를 획득하게 되었다
.

학교 교과서를 통해 몇십년 걸려도 깨닫지 못한 진정한 인권에 눈을 뜨게 됐으며, 부당한 권력에는 저항권이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리를 깨달았고 민주주의는 남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키고 창조한다는 진리를 알게 되었다. 지난 어두운 시절을 뒤로하고 이제 광주는 항쟁의 대명사로서만 아니라 한반도를 포함한 제3세계의 민중, 인권운동에 강력한 변혁의지를 심어주었다. 5
·18광주민중항쟁은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저항으로 출발, 자치공동체의 형성 및 정의를 위한 자기희생과 반인륜적 학살에 저항하는 세계적 인권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책임자가 권력을 장악한 참혹한 상황에서도 '5
·18 진상규명운동'과정에서 범국민적 저항으로 승화된 움직임은 세계 곳곳에 제2의 광주 공동체정신을 탄생시켰다. 5·18민중항쟁의 진상규명, 학살책임자 처벌, 명예회복, 기념사업, 배상이라는 5대 원칙이 필리핀의 민중혁명과 태국, 인도네시아의 민주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대만의 계엄령 해제 및 민주화 추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중국과 베트남의 개혁을 촉진시키는 요인으로도 작용하였고 동구의 민주화에도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광주항쟁이 기폭제가 된 한국의 민주화는 제3세계 민 5·18민중항쟁이 돋보였던 것은 항쟁 당사자들이 폭도로 몰리고 구속되는 암울했던 시절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반 독재투쟁에 나섰으며, 마침내 제3세계의 진정한 민주화를 출발시켰다는 점이다.

항쟁의 생생한 현장이 세계언론에 보도되면서 신군부의 부도덕성과 부당함을 여과없이 알렸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진압 주화의 모델로 정립되고 있으며 이른바 민주주의와 인권의 수출국으로써 입지를 굳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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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티에서 무단으로 퍼옴... ^^

철원이 아자씨 글...

퍼오면서 하나 더 붙이자면,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날은 언제쯤이나 올것인가. 스스로도 반성해야 할일이다.

http://www.politizen.org/zeroboard/zboard.php?id=wired&page=4&sn1=&divpage=4&sn=on&ss=on&sc=off&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38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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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이 흑인이라고 언제 사람같이 취급이나 했느냐. 어렵게 혼자 살때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잘 되면 쳐다보고 그렇지 않으면 쳐다도 안보는 게 한국 풍토 아닌가."-하인스 워드 모친의 오마이뉴스 인터뷰 기사 중에서-


고마해라, 애국질...

더이상은 몇몇 이해 관계자들과 자폐증 환자들을 제외하고 황우석 사태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없다. 그저 막바지를 향해 치닫는 검찰수사의 최종결론을 지켜보며 세기적 과학사기의 종주범과 비정상적 국세 횡령사건의 복마전이 밝혀지는 것만 남은 셈이다. 그리고 이후의 문제는 지금도 현장에서 묵묵히 연구에 매진하는 일선 과학도들의 땀과 눈물이 헛되지 않도록 과학계와 정부가 새로운 발전 청사진을 함께 내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더이상 이로 인하여 수십조의 국익이 현실화된다고 선동했던 정신나간 오바꾼들의 목소리는 온데간데 없다.

그러함에도 어쩌면 우리 국민들은 복도 무척 많은가 보다. 황우석 사태로 인하여 온 국민이 갑자기 줄기세포에 대한 교양과 상식을 학습을 받더니, 급기야 어쩌다가 걸리는 AFKN에서나 간혹 보았음직한 미국의 슈퍼볼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대화판의 왕따가 될 지경이 아닌가? 막말로 과거 정치판에서 떠돌던 이인제 학습효과보다 범위와 파장이 훨씬 컸던 황우석 학습효과의 후속편이라고나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나 하인스 워드를 둘러싼 부끄러움도 모르는 언론의 애국질의 당사자들마저 슈퍼볼의 영문표기가 Super ball이 아니라 Super bowl이란 사실이라도 제대로 알기라도 하는 것일까?

급기야 한국언론의 비뚤어진 과잉관심이 얼마나 부담스러웠으면 하인스 워드의 모친이 보다못해 "한국 사람들이 흑인이라고 언제 사람같이 취급이나 했느냐. 잘 되면 쳐다보고 그렇지 않으면 쳐다도 안보는 게 한국 풍토 아닌가"라고 일침을 가했을까? 어쩌면 그녀의 일침은 모든 과정과 원칙의 문제는 철저히 외면하며 강자 중심주의로 움직이다, 한 개인이 엄혹하고 처참한 상황 속에서 이룩한 땀과 눈물의 결정체만 알량한 국가의 자산으로 횡령을 하려는 빗나간 사회작동원리에 대한 분노이자 시니컬임에 분명하다. 즉, 황우석을 통한 약발이 떨어지자 하인스 워드를 내세워 '성공=애국'이라는 정글의 등식을 성립시키려던 언론의 과잉 애드립과 오바액션은 대가리를 싸안고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다행스럽게 하인스 워드의 모친은 황우석과는 달리 언론의 선동적 애국질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는 그녀가 살아왔던 삶의 과정 속에서 인식한 남한사회의 이중성과 가식에 대한 거부이며, 또한 우리 모두에게는 사회적 사각지대를 바라보는 올바른 인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숙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과연 입만 벌리면 태극기와 대한민국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과 그녀의 쓰디쓴 일갈 중에서 진정으로 남한 사회를 따뜻하고 밝게 가꾸어 가는데 어느 것이 더욱 소중하고 값진 것일까?

노동자들의 삼보일배와 자본의 공갈

얼마전 두꺼운 외투마저 얼게 만들었던 추위 속에서 휘황한 테헤란로의 인도를 네 발로 기어가며 자신들의 권리와 처우를 주장했던 하이닉스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더미 사이에서 삼보일배를 거듭하며, 단 한 꼭지의 9시 뉴스로도 알려지지 않는 하이닉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의 진실을 온몸으로 알리고자 손발이 땡땡 얼도록 박박 기었다. 하지만 여전히 노무현 정권은 누더기 비정규직법을 강행하려 한나라당과 입을 맞추고 있으며, 그 잘난 네티즌들과 언론은 차라리 '왕의 남자'에 열광하고 추락한 황우석에게 링거를 꽃아대기에 바쁠 뿐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뻔뻔하기 그지없는 자본의 쿠데타 계획이 터져 나왔다. 얼마전 남한사회 자본의 사령부인 한국경제인총협회의 회장이라는 사람은 비정규직 완화와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양대노총의 총파업 선언에 "이제는 비정규직 법안이 친노동 일변도로 처리되면 기업도 파업을 불사하겠다"고 공갈을 친 것이다.

사실 자본파업은 노무현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그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입맛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경제정책을 요구하며 사실상의 투자회피와 유휴자금의 투기화에 열성적이었다. 그들은 노무현 정권의 방향없는 시장영합적 정체성을 진작부터 꿰뚫어 보고, 현재 남한사회의 불안정한 경제상황과 국민 일반의 경제적 불안감을 볼모로 자본에 대한 전면적인 굴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솔직히 이쯤이면 알게 모르게 숱하게 존재하던 남한사회의 자칭 애국자들은 어디서 뭐하고 있나 모르겠다. 물경 자본이 나서서 국가를 말아 먹겠다고 큰 소리치고 있는데도 말이다.

자, 솔직히 말해보자. 엄동설한에 제 몸을 굽혀 네 발로 기어가며 외치는 하이닉스 노동자들의 비정규직 완화와 처우개선 요구에 대하여, 모든 공장설비를 외국으로 뜯어가겠다고 국민과 정부를 협박하는 경총의 짓거리를 어찌해야 하는가? 아니, 답하기 어려운가? 수출실적이 최고조에 달하여 돈더미를 은행과 부동산에 쌓아 놓고도, 비정규직에게만큼은 단 한 푼도 물러서지 못하겠다고 을러대는 이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거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되었지만 고작 실질적인 실효성이 없는 권고사항 정도로 입을 씻고, 오히려 모든 임금노동자의 비정규직화를 위해 법안의 날치기 통과를 저울질하는 이놈의 노무현 정권을 어찌 생각해야 하는가?

이제 우리는 영양가없는 애국질에 넌더리를 내야 한다. 오히려 아프지만 진실을 직시하고 쓰라린 성찰의 매를 서로에게 들이대야 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죄지은 놈은 죄값만큼 받아야 마땅하고, 적어도 대한민국의 국적자에게는 모든 헌법상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나는 그것이 정석이고 민주주의라고 알고 있다. 아무리 알량한 돈으로 떡칠을 한다 해도 범법의 죄과는 분명하게 별개로 물어야 하며, 가당찮은 핑계로 자본파업을 읊조리는 놈들의 행위도 국가전복 예비 음모로 단죄해야 마땅하다. 막말로 노동자들은 파업을 예고만 해도 경제부처가 나서서 공권력을 운운하며 난리더니, 자본가들은 자본파업을 운운해도 본척 만척 넘어가는 것이 정상적인 나라이며 여론이란 말인가?

모든 국민의 헌법상 권리를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는 더이상 국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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